블로그 이미지
로안담

태그목록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고독을 마주하는 하루

2013. 6. 28. 15:38 | Posted by 로안담

 병영을 나선 A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멎었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A는 자신이 길 잃은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도 가도 좋은 휴가는, 어디도 갈 곳이 없는 그에게 주어지기엔 가혹한 상이었다. 볼을 스치는 버석버석한 바람에 할퀴어진 텅 빈 가슴이 아렸다. 그 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빠? 나 매디!


 "...클로에구나."



 거봐, 오빠는 안 속는댔잖아. 잉, 이번엔 오랜만이라 될 줄 알았는데! 꼭 같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공허하던 A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떻게 바로 알고 전화했네. 방금 나왔어."


 -와, 진짜? 역시 난 오빠랑 좀 통하는 데가 있나 봐.



 클로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매디슨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오빠, 잘 지냈지? 별일은 없구?


 "그래, 다 좋아."



 다 좋아, 라. A가 씁쓸하게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가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어린 여동생들이 저와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안도했다.



 "아팠다며. 지금은 좀 괜찮아?"


 -언제적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오빠는! 그깟 감기 하루 이틀 아프면 끝이라구.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다며 타박을 하면서도 매디슨의 목소리는 쾌활하기만 했다. 그래서, 오빠야말로 몸 아픈 덴 없어? 지나가듯 묻는 말에 A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제 왼팔을 향했다. 이번 임무에서 코어와 강하게 충돌한 후 칼날의 연결부위가 휘어버려 날을 넣었다 뺐다 하기 영 불편했던 부위였다. 아귀가 맞지 않던 이음쇠가 말끔히 수리된 왼팔을 바라보며 A가 대답했다.



 "응, 없어."



 다친 적은 있는데 수리했어. 여동생에게 말해주지 못할 진실을 속으로만 전해 주던 A는 뭔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다친 게 아니라 고장난 건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부상보다는 고장, 치료보다는 수리가 어울리는 팔을 가만히 보고 있던 A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건강 검진을 하면서 부품을 수리한다는 것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확실히, 의료도구라기보다는 공구에 가까운 기구를 들고 다가서던 자에게서는 소독약이 아닌 기름 냄새가 났다.



 -오빠 오빠, 휴가라며! 어디 갈 거야?



 다시 클로에였다. 번갈아가며 앞다투어 말을 하는 쌍둥이의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기에 A는 놀라지 않았다. 휴가라는 말에 제가 더 들뜬 기색이 역력한 클로에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우리 보러는 못 오는 거지? 아깝다. 뉴욕에 가보는 건 어때? 요새 패션위크잖아! 얼마 전에 맨해튼미술관에서 루브르전 시작했던데 그거 보러 가도 좋을 것 같구. 미리 찾아봤는지 온갖 전시전, 음악회 등을 줄줄 쏟아내는 클로에의 말을 A가 적당히 끊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몇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래, 알았어. 다 가볼 순 없으니까 그 중에서 골라 볼게. 고맙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꼭 가봐야 해?



 모처럼의 휴가인데 재밌게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클로에의 목소리를 끝으로 오랜만의 통화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A가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았다. 여동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휴가기간 내내 걸려올 전화를 받아주기엔 그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의 주위를 떠돌던 여동생들의 생기가 허상처럼 흩어졌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A가 무의식을 따라 움직였다. 발길이 향한 곳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오는 길에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공동분향소 안은 한적했다. 현실에 가장 치중해야 할 평일 낮 시간에 하릴없이 죽은 이를 그리고 있을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다. 그 몇 없는 방문객 중에서도, 흔한 꽃다발 하나 없이 무작정 발을 들인 사람은 A 혼자뿐이었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훑어가던 A의 발걸음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멎었다.



[Hewer, Frank]



 작은 유리장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곱게 내려앉은 만년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금속 특유의 빛을 내는 손가락이 만년필의 윤곽을 가만가만 따라갔다. 구조대에게 발견되어 집을 벗어날 때, 괴사된 손으로도 놓치지 않고 있던 만년필이었다. 한때는 집에서 유일하게 들고 나온 물건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그런 감정마저 희미했다. 할아버지의 유품은, 결국 A에게 할아버지의 부재를 각인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A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이 다였다. 보고싶다는 말 한 마디조차 선뜻 나오질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그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이를 잃었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자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곱씹고 또 곱씹어서, 이젠 아무리 헤집어도 진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문 상처. 그 위를 새삼 긁어 보아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 보고싶다 말해 보아도 정작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제 A는 제가 죽은 이를 그리워하기는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헛헛한 마음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기댈 데 없는 나약한 자신의 증거에 불과한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제 감정의 색깔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외롭네요, 할아버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불쑥 튀어나온 말이 뒤늦게 그를 덮쳤다.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 낯익은 군복을 입은 자가 이 쪽을 향해 있는 것이 언뜻 보였지만 A는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A는 저를 마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 마주쳤던 주제에 분향소 바로 앞의 바를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사위가 어둑해질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있던 터라 상대가 여태 근처에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아마 토벌부대였던가. 언젠가 직속 부하인 아이엘에게 룸메이트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A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적어도 A에게 경례를 붙이는 대신 담담한 눈인사를 던질 정도의 눈치는 있는 자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말을 붙였겠으나, A는 제 안으로 침잠하는 자신을 술의 힘으로 달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옭아매고 놓아주질 않는 이 만성적인 공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그림자에 다른 이를 밀어넣고 거짓된 위안을 얻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만일 그가 바라는대로 아직까지 망자의 상실을 이기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 땐 그저 떠난 이의 빈자리를 끌어안고 삭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제 안에 있는 외로움이 그리는 것이 과연 죽은 프랭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요 근래 그분을 생각한 적이 있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술기운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지 A의 생각이 걸러지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당신은 어땠지. 당신도 잃은 사람을 잊지 못해 나처럼 방황했나. 그래서 그 곳에 왔던 게 아니었나.



 "늘, 그렇습니다."



 느릿한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부러웠다. 그래. 그게 맞는 거겠지. 누군가가 그리워 이토록 힘겨운 거라면 매일같이 그 사람을 그리는 게 맞겠지. 그런데 왜 난 그렇지 못할까.



 "상사님은 어떠십니까."


 "...모르겠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내뱉은 대답은 결국 그것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이젠 돌아가신 그분이 보고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내 안에 채워넣을 누군가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 어쩌면, 나를 기댈 사람이 필요한 것뿐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겁이 나.



 "술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A는 대답 없이 제게 쥐어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꽤 마신 것 같은데도 제 안에 얽힌 감정은 선연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혼자였나.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이 단순히 홀로 남은 외로움에 불과한 감정이라 해도, 그를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의지할 성정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글펐다. 아까는 뿌옇기만 했던 생각들이 선명한 말이 되어 가슴 속을 맴돌았다.



 할아버지, 저는 더이상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당신은 여전히 그립지만 그 때문에 아프지는 않아요. 이제 제 고독에 당신을 핑계삼을 수도 없는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Their stories > 잊기엔 아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과 시체의 조건  (0) 2013.06.28
데자뷰  (0) 2013.06.28
두통  (0) 2013.06.28
마지막 겨울  (0) 2013.06.28
망자를 그리는 밤  (0) 2013.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