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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받은글2

로안담 2013. 6. 28. 16:09

새벽녘의 불그레한 햇빛이 삼켜버린 포도주 대신 빈 잔을 채웠다. 너를 마시면 나는 또 얼마나 공허해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처량한 의문이다 싶어 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조적인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당연하게도, 말라붙은 입술을 적시는 것은 잔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한 방울의 술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 안의 뭉그러진 감정이 터져나올까 두려워 밤새도록 꾸역꾸역 삼킨 그것이 정말 술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극히 단편적인 기억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허를 견디지 못해 헐떡였던 순간들, 과거에 잠식당해 무너지던 자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겁게 그를 짓누르는 상념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주신酒神은 그에게 도주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다만, 이미 무디어진 혀끝에도 달큰한 포도주의 향만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주위를 맴도는 달짝지근한 향은 그가 바랐던 위로보다는 조롱에 가깝게 느껴졌다.


너도 참 부질없이 비어졌구나. 손가락 끝에 간신히 걸린 유리잔은 거꾸로 뒤집힌 채로도 탐욕스럽게 붉은 햇살을 머금었다. 그 꼴이 하도 가련하고 우스워서 그는 미련없이 잔을 놓았다. 밤의 낭만을 위해 만들어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유리잔은 퍽 소리와 함께 산산이 터져나갔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익숙한 파괴의 비명에 그의 숨이 멎었다. 한참을 부유하던 침묵은 그가 허탈한 웃음을 뱉어내고 나서야 깨어졌다. 제가 은연중에 꽤나 고전적인 쨍그랑 소리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흘린 그 웃음의 이면에는 작은 흔적만으로도 그녀를 갈구하고 상처받는 저를 향한 지독한 연민이 깔려 있었다.


격정을 숨긴 시선 끝에 유리의 잔해가 밟혔다. 온전했을 때의 유려함은 없었지만, 제멋대로 부서진 빛조각에는 그 나름대로의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와의 차이였다. 깨어지기 전의 유리잔보다도 위태로운 섬세함을 지녔던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으니까. 사람의 조각은 결코 빛나는 법이 없었다. 온통 붉은 그 광경 속에서 그는 그것을 지독히도 실감했다. 다정했던 그녀답지 않게, 빛무리 하나 남기지 않고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나직한 후회가 방 안을 맴돌았다. 너를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나. 처음부터 함께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피붙이와 함께 숨을 거두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의미 없는 자조를 되풀이하며 그는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못다한 말들이 머릿속을 아찔하게 채워 그는 허겁지겁 숨을 삼켰다. 네 다리가 되겠다 했었다. 다음 생에는 내 다리를 주겠다고도 했었다. 그 때는 내 대신 원없이 걸어보라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하는 내게 너는 말없이 기쁜 듯 웃었더랬다. 그런데 다 헛것이었다. 나를 떠난 지금, 너는 이제야 걷게 되었으리라. 너와의 장난스러운 약속 안에 조심조심 눌러 담았던 내 진심도 참으로 무색하게 되질 않았나.


허무로 포장한 고독이 끝내 한 방울 눈가에 맺혔다. 아주 옛날처럼, 그는 이제 다시 혼자였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는 결국 되풀이되었다. 더욱 상처받고 망가진 채. 조심스레 맛보았던 행복의 편린은 날카로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언제쯤에야 이 지긋지긋한 통증이 사라질까. 그는 답을 구하듯 망연한 시선을 던졌지만, 조각난 유리잔은 더는 빛나지 않았다.




리퀘내용 : 어렸을 때 가족몰살당하고 다른 가문에서 이방인처럼 자란 남자가 그집 큰 아들 대신 팔려가듯이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나름 아내랑 행복해지려다가 자신이 연루된 모종의 일로 아내가 폭사해서 다시 좌절하는 장면. 남자는 겉으로는 올바르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가는 성격이고 아내는 말이 필요없는 다정한 성녀에 두 다리가 불편한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