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를 그리는 밤
망자를 그리는 밤
―M, M.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나는 여느 꼬맹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왜 그러니, V?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녀 또한 언제나 나를 V라고 불렀다. M은 좀처럼 나를 이름 대신 이 녀석이라거나 얘, 아들 등의 호칭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V였다.
―왜 나는 M을 다른 애들처럼 엄마라고 안 부르고 M이라고 불러?
왜 엄마는 나를 우리 아가라고 불러주지 않아? 왜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아?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호칭 하나에 섭섭해하고 울상짓기엔 이미 M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내게 쏟는 정성을 모른 척 칭얼대기엔 나는 제법 눈치가 좋고 영악한 꼬맹이였다. 하지만 내심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제 아이를 밑도끝도 없는 대명사로 부르며 어르는 어미들을 볼 때는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기분이 들곤 했다. 콕 집어서 이유를 묻는 내게 M은 일견 정당해 보이는 이유를 대었었다.
―V, 엄마라는 말은 너무 흔하잖니. 엄마라고 부르면 돌아볼 여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M이라고 부르면 돌아볼 사람은 나뿐이잖아?
실상 의미 없는 변명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수긍해야 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하고 덧붙이며 슬쩍 보여준 그녀의 장난스러운 미소 때문이었다. 나와 꼭 같은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가에 악의 없는 미소가 걸리는 그 순간의 M은 참 예뻤다. 어린 내 눈에도 나의 엄마인 M보다, 소녀처럼 웃는 M은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선뜻 불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M 바보.
결국 내가 볼멘소리를 하는 것으로 짧은 논쟁은 끝이 났었다. 삐졌냐며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오는 M은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나는 속엣말을 삼키고 입술만 삐죽이 내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M이라는 말은 M한테는 너무 흔한 말이잖아. M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많아도 엄마라고 불러줄 사람은 나 뿐이잖아.
하고 싶은 말을 작은 몸뚱이에 밀어넣느라 잔뜩 부풀린 볼을 콕콕 찌르던 그녀의 손가락은 유려하고 섬세했다. 타고난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 손을 나는 좋아했다. 톡톡 두드리듯 볼을 만지는 손길이 간질간질해서, 나는 금세 부루퉁한 기분을 풀고 배시시 웃고 말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나한테도, 엄마라고 불러볼 사람은 M 뿐이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까. 적어도, 당신이 죽기 전에 엄마라고 불러볼 일은 있지 않았을까.
"엄마..."
역시 어색하다. 안 하던 짓은 이래서 하면 안 되나 봐. 그렇지, M? 방 안을 채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나는 조금 웃었다. 어느새 입술에 내려앉은 눈물이 차가웠다. 혀를 내밀어 핥은 그 눈물의 맛은 몹시도 썼다.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M. 엄마. M. M. 내 엄마. 나의 M.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핏빛을 닮은 탐스러운 적발도, 깊은 숲의 녹음과도 같은 눈동자도. 문득 바라본 거울 속에만 존재하는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입가에 걸린 웃음을 내리쳤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와중에도 달빛을 받아 드문드문 비치던 얼굴이 산산이 조각났다. 손이 뜨끔하더니 이내 질척하게 젖었다. 그저 검게만 보이는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검게 물든 손을 들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슬쩍 핥아본 그 눈물은 여전히 썼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와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M, 당신이 이 꼴을 봤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당신도 나와 같이 웃었을까. 아니면, 조금 울었을까?
아무래도 좋아. 보고싶어.
"보고싶어, 엄마..."
그제야 피맛이 느껴졌다. 상처가 욱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