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ir stories/잊기엔 아쉬운

사람과 시체의 조건

로안담 2013. 6. 28. 15:46

텅. 묵직한 철제 상자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무심코 뒤를 돌아 본 A의 시야에 한 병사가 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반대편 손목을 그러쥐고 있었다. 방금 손잡이를 놓친 듯 보이는 손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런. A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네도 다쳤나?"



 다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 깔려 있는 물음에 병사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오늘따라 안 다친 사람이 없군. A가 속으로 혀를 찼다.



 "가서 치료부터 하게. 이건 내가 연구실에 전해주지."



 병사가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그는 바퀴 달린 캐비닛처럼 생긴 박스의 손잡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쾅쾅쾅. 박스 안에서 주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력과 도주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양 다리가 절단된 코어가 자신의 관 안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A는 손잡이를 좀 더 단단히 그러쥐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박스의 움직임이 마치 생명의 약동처럼 느껴져서, A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무렵, M은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연신 양 팔뚝을 비비며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씨발, 왜 이렇게 안 와. 얼어 뒤지겠네. 40분 전, 약간의 불평-'도대체 어떤 등신같은 새끼가 이 날씨에도 금연구역을 만들어 놓은 거야? 담배 피는 것들은 다 나가 뒤지라고?'-과 함께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다가려던 그는 20분쯤 후면 영하지역에 투입되었던 부대가 코어 샘플을 가지고 복귀하기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차피 나가 있을 건데, 앞에 있다가 만나서 받아올까. 사실 남을 건물 앞까지 마중나가 살갑게 맞이한다는 것은 그의 성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냥 나온 김에 같이 들어가지 뭐.'라는 생각에 M은 시계를 확인하고 건물을 나섰었다.



 헌데 약속된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온다는 부대원은 나타나질 않았다. 빌어먹을, 오기만 해 봐. M은 이를 득득 갈았다. A가 기지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으로부터 20분을 더 기다린 M이 재수 옴 붙었다며 담배꽁초를 휙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코어 운반용 박스를 끌고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M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제 오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이 몇 시..."



 언제나처럼 사정없이 상대를 몰아쳤어야 했던 M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뚝 끊겼다. 그때 그 형씨 아냐. 델몬트.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M이 잠시 말을 멈춘 사이, A가 지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자네가 코어 샘플을 기다리고 있었나? 미안하군. 생각보다 부상자가 많아 부대 복귀가 늦어졌네. 밖에서 기다렸나 본데, 춥진 않은가?"



 M은 몹시 떨떠름한 시선으로 A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눈여겨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벌써 두 번째로 그가 화를 낼 타이밍에 끼어드는-이번엔 본인이 그 당사자였지만- 사내의 계급은 상사였다. 물론 M이 군인도 아닌데 계급이 높다고 봐주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일이병들한테나 시키는 일을 상사씩이나 되는 자가 하고 있는데 화를 내려니 기분이 영 껄쩍지근했다. 씨발, 이건 뭐. 똥 싸다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거, 상사씩이나 되어서 왜 이런 걸 날라?"



 영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던 M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거'라는 M의 단어가 A의 가슴에 콕 박혔다. 그가 별다른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A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부대원들이 많이들 다쳐서. 힘들어 보이길래 오늘만 쉬라고 한 번 해본 것 뿐이네."



 딱히 평소에도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냐, 하고 덧붙이는 A을 보던 M은 콧방귀를 뀌었다. 천사 나셨구만. 딱히 싫을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M은 A가 어딘지 영 불편하기만 했다. 어느 새 건물 입구로 다다른 그들이 출입구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잠시 멈춰섰을 때, 어느새 잠잠해져 있던 박스가 다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럽게 팔팔하네. 물끄러미 박스를 바라보던 M의 시선이 A에게로 향했다. 이것도 아무나 못할 짓이구만.



 "그거 또 그 지랄이네. 그쪽도 짜증나겠어."



 그 한 마디에 A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탕탕탕.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박스를 잠시 내려다 본 A가 M의 검은 눈을 직시했다.



 "짜증나는 게 아니라 불쌍한 거지."



 M로서는 이런 개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불쌍해? '저게'? 성자 나셨구만."



 또다시 코어를 물건 대하듯 하는 말에 A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빈정거리는 M의 말투보다도 그 단어가 훨씬 더 거슬렸다. A는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자네, 말조심하게."


 "그쪽이야말로 말을 똑바로 해야지. 재수없게 영하지역에 있다가 코어가 된 놈이 불쌍하면 또 몰라도, 코어가 불쌍해? 별 개같은 소리를 다 듣겠네. 임시보호센터에 있는 놈들한테 그런 말 했다간 아마 댁을 찢어죽이려고 할 걸?"



 A는 M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이해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M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존나 말 돌리지 마. 알면서 뭘 물어? 당신 설마 코어랑 사람이랑 구분도 못 할 정도로 병신이었어?"



 M의 대답에 A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뭐야, 진짜였어? 그럼 귀찮게 됐네. 미친놈은 피하자는 주읜데. M이 정말로 낭패라는 듯이 얼굴을 짜증스럽게 구겼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A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괴로움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코어도, 결국 사람이 죽어서 변한 존재라는 걸 모르나?"


 "말 잘 했네! 그래, 죽었다고. 죽은 사람 몸뚱이에 바이러스만 들어찬 게 코어라고. 잘 아네. 근데 뭐가 불쌍하네 마네 개소리야?"



 M은 A가 이제라도 말귀를 알아들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느새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씨발, 감기걸리게 생겼네. 다 좋으니까 빨리 들어가지?"



 A와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M의 태도에 A는 가슴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네는."



 뭐? 다섯 칸 남짓한 계단을 다 올라간 M이 아직도 계단 아래에 서 있는 A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안 올라오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M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려던 순간, 낮게 가라앉은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뭘?"



 M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팍 찌푸렸다.



 "미친, 앞도 뒤도 다 잘라먹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자네는 어떻게 코어가 된 사람과 코어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느냔 말일세. 어떻게 코어에게 최소한의 연민도 갖지 않을 수 있지?"



 A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은 끝에 가서 언성이 약간 높아지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평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 채, 그는 심호흡을 하며 M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 M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코어들 사이에서 구조된 제네시스이자 ACG의 군인인 주제에 코어에 대해 강한 연민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뭐 이런 가증스런 새끼가 다 있어? M은 올랐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 A의 멱살을 잡았다.



 "이거 또라이 아냐? 코어가 된 사람은 당연히 영하지역에 있다가 뒤진 놈들을 말하는 건데 그게 어떻게 코어랑 같아? 그리고 뭐? 연민이 없어? 미친 새끼. 그 정도면 도대체 그 동안 코어랑은 어떻게 싸웠냐? 아니, 당장 오늘만 해도 니 손으로 몇 놈이나 머리통을 부쉈는데? 코어 죽이는 게 업인 새끼가 나보고 뭐가 어째? 뭐 이런 미친 게 다 있어!"



 M의 얼굴에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건 뭐 위선도 정도가 있어야지. 존나 역겨운 새끼 아냐.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A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코어는 결국 코어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사람 말이야. 비록 그 생명도 잃고 몸의 주도권도 뺏겼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게 사실 아닌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코어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나 최소한의 존중도 없을 수 있지?"



 이를 악문 채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어진 A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M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지랄 마! 아까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코어는 죽은 사람의 몸이라고! 우리가 코어라고 부르는 '그건' 이미 사람이 아냐! 씨발, 니가 연구실 와서 한 번 볼래? 코어 몸뚱이랑 인간 몸뚱이가 얼마나 다른지? 사람 뜯어먹는 짐승이 어딜 봐서 사람인데 이 새끼야! 그리고 너 왜 대답 안 해? 말해 봐. 넌 왜 죽이는데? 넌 코어 왜 죽이냐고 이 개자식아. 왜, 아예 한 놈 한 놈 쏠 때마다 하늘에 기도라도 하냐? 오 신이시여 제가 오늘 한 사람을 또 죽였나이다, 이 지랄이라도 해?"


 "그들을 죽이는 건 사람인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의사에 반한 채로 괴물로서 살아가지 않길 바라지 때문이지, 그들이 무슨 해충처럼 쉽게 죽여 없애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네. 내 말이 틀렸나? 나는 자네가 코어를 실험체로 사용하는 걸 말하려는 게 아냐. 그 역시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하지만 자네는 나와는 달리 완전히 그들을 경시하고 있어. 그게 자네와 나의 차이이고, 난 그걸 참을 수가 없네!"



 빠른 속도로 쏘아붙인 A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M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미친 새끼. 괴물로서 '살아가는' 거 좋아하네. 코어는 살아있는 게 아냐. 애당초 살아 있는 생명도 아니라고. 그냥 죽은 고깃덩이가 살아 움직이는 거거든? 넌 시체 보고 절하냐? 일반 병원에서도 사람 시체로 해부하는 판국에 산 사람 뜯어먹는 시체한테 뭘 얼마나 대우해줘야 하는데!"


 "산 사람 뜯어먹는 시체라니! 자네가 영하지대에 있었어도 그 소리가 나오겠나!"


 "못 나올 게 또 뭐 있는데? 사방에서 시체들이 날 뜯어먹으려고 하는데 씨발 어이쿠 안되셨네요 소리가 참 잘 나오겠다 이 새끼야! 썅, 막말로 내가 코어가 된다 해도 그때부턴 그냥 썩어가는 사람고기라고 이 병신아!"



 분을 못 이긴 M이 A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맞은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한 A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A는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M에게 쏘아붙였다.



 "썩어가는 사람고기라고 했나? 정말로 죽어서 썩어가는 사람고기는 움직이지 않아!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단 말이네!"


 "하! 움직이지 않아? 와 씨발, 그거 존나 큰 차이네! 병신아, 썩은 사람고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때부터 움직이는 거야! 결국은 코어가 되나 아니나 그 몸뚱이 자체는 그냥 시체라고! 시체! 몰라? 이미 한 번 시체가 되면 그걸로 끝이야! 왜, 죽은 사람 화장하면 아예 화형시키는 거라고 하겠다? 개소리 집어쳐! 코어든 뭐든 결국 다 똑같은 시체에 불과하다고! 이미 죽은 사람 몸뚱이에 감정이입하는 니새끼가 병신인 거야!"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M의 오른뺨에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손등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A가 로비에서 보고 있던 다른 군인들이 몰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죽은 가족이 일어나 움직이는 걸 보고도 그 시체가 무덤에 묻혀 있는 것과 똑같이 여길 수 있겠나! 사람이 아니라고! 불쌍하지 않다고! 사람으로서 죽은 시체와 죽은 뒤에도 괴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네가 더 사람같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