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뭐, 어쩔 수 없지. 흐트러진 시트를 가슴께로 끌어올린 B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습게도 A는 그녀의 웃음이 마치 먹기 싫은 음식을 강아지에게 떠넘기다 들킨 개구쟁이같다는 생각을 했다. 딱 그 정도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숨김없는 아침의 햇살 아래 드러난 나신을 보고서도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은 고작 그런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들의 관계처럼, 그날의 일도 그저 또 하나의 순간으로 지나갈 줄로만 알았다.
4.
나, 임신했대.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 대사같지 않아? B는 흐느끼듯 웃었다. 그 처연한 웃음은 강인한 그녀를 지독히도 슬퍼보이게 했다.
몰랐어. A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말? 하는 반문이 그의 마음 속 어딘가에 묻어뒀던 그간의 기억을 쿡쿡 찔러댔다. 몰랐어? 정말 몰랐어? A는 눈을 질끈 감았다.
1.
너, 슬슬 그거 할때 되지 않았나. A가 불쑥 던진 배려없는 말에 여지없이 B의 타박이 돌아왔다. 넌 뭘 그런 걸 세고 있냐, 남 민망하게. 평소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A는 내심 안심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익숙한 시선에 담긴 작은 불안의 조각이 A의 가슴에 시큰하게 박혔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잘못 봤을 터였다. 그래야 했다.
2.
너... 아니야.
또다. 이번에도 또 B가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단단한 결심을 나타내듯 완고히 다물린 그녀의 얄팍한 입술이 평소보다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단호한 빛깔이 마음에 들어서, A는 이번에도 호기심이 거세된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뭐냐, 싱겁게. B의 입술이 겨우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것은 A의 단단하고 긴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를 두어번 찌른 다음이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잘만 웃는데. 그녀의 미소가 끝내 공허하게 흩어지는 것을 보고도 A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편이 자신에게 편했다.
3.
짧은 머리칼 아래 드러난 그녀의 흰 목이 조금 쓸쓸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5.
눈을 뜨자, A의 망연한 시선에 여지없이 B가 닿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아른거리는 눈물이 놀랍도록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A는 B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툭, 하는 미약한 파열음과 함께 눈물이 산산이 부서지자 손이 크게 떨렸지만 B는 고맙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거기까지 신경쓸 수 없던 걸지도 모른다. A는 그 점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혹감과는 다른 감정으로 뛰기 시작한 심장을 B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그의 혼란을 B와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A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리퀘내용 :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온 친구 사이인 A와 B. 각자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에겐 1g의 연애감정도 없는 순수한 친구. 하룻밤 장난 때문에 B가 A의 아이를 가져버려서 두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시츄. 눈물을 보이는 B에게 이성이 아닌 '여성'을 느끼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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