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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8 My soulful flowerbed
  2. 2013.06.28 체벌 전의 면담
  3. 2013.06.28 사람과 시체의 조건
  4. 2013.06.28 데자뷰
  5. 2013.06.28 고독을 마주하는 하루
  6. 2013.06.28 두통
  7. 2013.06.28 마지막 겨울
  8. 2013.06.28 망자를 그리는 밤
  9. 2013.06.28 불청객의 의료봉사
  10. 2013.06.28 목을 잃은 명마

My soulful flowerbed

2013. 6. 28. 16:01 | Posted by 로안담

꽃만큼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또 있을까. 화사한 자태와 더불어 그 안에 움튼 생명까지도 뽐내는 꽃은 몇 번을 보아도 생소하기만 하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만개한 꽃들을 보고도 낯선 향기에 매혹될 줄 모르는 마음은 되려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어찌보면 조금 유난스러운 감정이긴 하다. 아무리 메마른 사막이라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선인장 틈바구니로 고개를 내밀던 선명한 색채의 꽃송이나, 오아시스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보이던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들꽃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꽃'을 대표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 보이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도 꽃이 무엇인지 정도는 꽤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심심찮게 보았던 선인장 꽃마저도 쉬이 그려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붉디붉은 빛깔부터 도톰한 꽃잎까지, 전부 손에 잡힐 듯 떠오르다가도 아릿하게 흩어지는 꽃의 잔상. 그것을 한참 쫓다가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아, 내게 꽃은 허락되지 않았었지.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오직 일족의 승리와 조국의 영광뿐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다른 생명까지 찬미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였나보다. 꽃을 어여삐 여길 줄 모르는 내가 꽃의 달콤한 향에 취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는 좀 친해져 보는 것도 좋을텐데 말이야. 그렇지? 꽃과 자신, 둘 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 반문을 던져본다.


“네가 이 의뢰를 맡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때마침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한 말을 해온 것은 어엿한 한 사람의 네크로맨서라, 슬며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억울한 척을 해 본다. 글쎄, 나보다는 사실 네 쪽이 더 상상이 안 갈 법하지 않아? 방금의 복수라면 복수인 셈으로 있는 힘껏 정곡을 찔러 보았으나 그에 돌아온 대답은 맥빠지게도 겨우 한 글자다.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너 자신을 알라, 헨젤.”


미간을 콕 찔러가며 그렇게 타박하긴 했지만 사실 나의 친구는 일반적인 네크로맨서의 외양과는 영 거리가 먼 녀석이다. 물론 저 졸린 듯한 얼굴 뒤에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는 가칭 '발 없는 친구들'을 본다면 어느 누구도 헨젤 그리피스가 네크로멘서답지 못하다는 말은 할 수 없을 테지만. 잠시 너와 그들의 적응되지 않는 상하관계를 떠올리며 피식거리고 있자니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녹색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너는 어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까. 네 것이 아닌 두 개의 눈동자를 앗아간 모래바람이 너를 그만큼 깎아냈을까? 죽음조차 겁내지 않을 정도로? 실은 조금 궁금했다. 편견이긴 하지만, 사실에 기반한 두려움을 사는 직업을 네가 굳이 택했던 이유가. 알고 싶지 않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끌어낼 이야기는 아닌데다가, 먼발치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꽃들을 외면하고 굳이 꺼내고 싶은 화제도 아니었기에 나는 뻔한 엄살을 부리는 쪽을 택했다. 실감나는 연기가 아니었던 탓인지 그다지 잘 먹혀든 것 같진 않았다. 네가 내 손가락을 더욱 단단히 옥죄고 못살게 구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면. 장난스럽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가 싱그럽다.


“아프잖아, 헨젤!”


손가락을 겨우 빼내는 척을 하며 괜한 심통을 부려본다. 어째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조금 민망하지만 모른 척 싱글싱글 웃었다. 문득, 허리께에 겨우 올라오는 애늙은이 하나가 생각나 더 멋쩍은 기분이 된다. 다 큰 어른 주제에 여섯 살배기보다 더한 응석이라니 좀 심하긴 하지. 그렇지만 마냥 편안한 지금의 분위기가 좋아서 더 멋대로 굴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약간 복잡한 머릿속 상념들을 털어버린 채,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십대 사내애들마냥 사소한 장난질로 킬킬거리는 지금이, 마냥 좋았다.





더 많은 꽃들을 찾아 들어선 한낮의 평원은 많은 소리가 이루어낸 정적을 담고 있었다. 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이들이 입을 다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온갖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바람이 만들어낸 부산스러운 풀잎의 노래, 사람의 기척에 서둘러 몸을 숨기는 풀벌레나 작은 짐승들의 움직임, 부드러운 풀밭에 착실히 제 흔적을 남기는 너의 발소리. 형편없이 짓눌렸을 풀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마지막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든 소리는 내가 걸음을 옮길수록 멀어져갔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은 타박타박, 일정한 울림을 지닌 채 내 곁에 머물렀으니까.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옆에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애써 말을 붙이지 않아도 지루해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한참을 말없이 걸어들어왔으니 심심할 법도 한데, 그새 익숙해져버린 안온한 기분에 외려 입꼬리만 슬며시 올라간다. 바로 그때, 보폭이 달라서인지 계속 따로 놀던 둘의 발소리가 우연히 맞아들었다. 마치 마법처럼,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준 선물처럼. 우스우리만치 사소한 것인데도 왜 그리 좋았는지. 하마터면 휘파람이라도 불 뻔 했다. 오로지 걷는 것만으로 충만한 이 기분을 깨기 싫지만 않았다면 아마 분명히 그랬겠지. 바보같은 즐거움을 혼자서 품고 히죽 웃으려니 뺨에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어느새 어긋나기 시작한 발소리 너머로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에 스프를 가르쳐달라고 했지.”

“응.”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지.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제풀에 잊어버린 이야기였다. 어쨌든 아직은 집도 구하지 못했으니 당장 급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저 앞으로 여관이 아니라 집에서 살게 되면 바나타에게 먹일 게 없을테니 배워놔야겠단 심산으로 지나가듯 말했던 건데 신경쓰고 있었다니 조금 미안해진다. 물론 그보다 배로 고맙기도 하고.


“뭐 생각해본 거 있어?”

“무난하게 크림 스프. 달콤한 게 끌린다면 단호박 스프.”


단호박이라면 달짝지근하니 애들 입맛엔 그럭저럭 합격점이겠지. 물론 내 요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전제 하에. 더 고려할 것도 없이 단호박 스프를 외치려 할 때, 맹랑한 우리 꼬맹이의 얼굴이 눈 앞을 스쳐간다. 녀석에게 애답지 않은 구석이 한둘도 아닌데 거기에 입맛이 포함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나중에 애기한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게 나으려나. 일단은 둘 다 마음에 든다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며 대답을 망설이자 그럼 둘 다 하자는 명쾌한 해답이 돌아왔다. 실로 명답이다. 바나타가 둘 다 싫다고 하면 그땐 내가 다 먹으면 되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편식부터 고쳐준 다음 다 먹이면 되겠구나. 아이의 식탁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터라 새삼 내가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와닿는다. 솔직히, 조금 심란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외로 가사에 출중한 나의 친우는 스프에 꽃을 넣자는 듣도보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네 요리실력을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짓무른 풀 씹는 맛일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맛은 모르겠지만 보기엔 좋겠다는 말로 슬그머니 한 발을 뺐다. 헨젤, 난 꽃이 맛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어. 내 미적지근한 반응이 너를 자극했던 걸까? 네가 꽃을 스프에 첨가해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향도 좋고, 꿀이 있어서 달콤하기도 하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 나는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하하, 우리 헨젤 말하는 게 무슨 요리 연구가 비슷해 보이는데?”


나는 끝까지 좋다고는 안 했다, 헨젤.


“엘리스가 말해준 거야. 꽃 스프는 어떠냐고.”


드디어 꽃과 스프를 함께 먹는다는 참신한 발상의 근원지가 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라 말해줘도 모르긴 하다만. 내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가게 주인이라는 부연설명이 따라붙는다. 엘리스, 엘리스라. 내게 말해준 적이 있던가? 네가 말하는 엘리스가 마치 닮지 않은 누이처럼 보이는 흑발녹안의 여인이라면 내가 봤던 사람이 맞을 게다. 너희 가게 반대편 문에서 나오는 것을 봤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난 왜 궁금해하질 않았을까. 하도 찰나간의 마주침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막연히 네 연인이거나 가족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것일 텐데. 이런 작은 일에서도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언제쯤이면 나는 당연스럽게 네게 이것저것을 캐물을 수 있을까. 대체 언제쯤에야 서로를 내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을 수 있지? 조급함을 숨기려 그저 고개만 끄덕여본다. 다행히도 너는 그 묵묵한 긍정을 되돌려주었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났어?”

“오래 전 어느 사막의 마을에서 처음. 그리고 우연하게 만나고, 또 만나고.”


인연이구나.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지금은 함께 살고 있다는 너와 그녀의 연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난 너희의 사연을 모르니까, 아주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때마침 그 사연의 끝자락이 슬쩍 풀려나온다. 엘리스가 없었다면 난 사막에서 말라 죽었을지도 몰라.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상 치고는 제법 담담한 말투다.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섬뜩할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네가 안쓰러웠다. 주제넘게도.

 

“너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


그 여상스러운 말이 꼭 '너도 누군가에게 구명받아야 할 정도로 절박했던 시간이 있었겠지' 라는 말처럼 들렸다면 내 피해의식이 과한 탓일까. 너는 이미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네게서 슬픔의 그림자를 찾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서글펐다. 마치 내가 널 동병상련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서. 그건 절대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우리의 동질감이 거친 사막의 바람에 기인하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나는 그걸 네가 알았으면 했다.





바삐 발을 놀려 앞서가던 너는 어느새 사그라든 웃음을 내게 다시 되찾아주었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못한 고소苦笑이긴 했지만.


“……그런데 헨젤.”

“응?”

“꼭 저놈들, 아니 저분들을 불러둬야 되나?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하다구.”


헨젤, 나는 우리가 같은 의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저기서 꽃 퇴치 의뢰를 충실히 수행하는 '친구들'을 보기 전까지는. 아예 꽃이라는 존재를 이 널따란 평원에서 멸절시키겠다는 투지마저 엿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꼭 사신처럼 보인다. 그것도 꽃 전문 사신. 비록 낫은 들지 않았지만 꽃의 모가지를 댕강댕강 끊어내는 솜씨가 당장 그쪽 업계(?)로 취업해도 될 만큼 일품이다. 대체, 곤란에 처한 소녀를 대신해 꽃을 따다 준다는 상큼하고 로맨틱한 의뢰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내 기운빠진 어조를 눈치채지 못했을 네가 아닌데도 너는 얄궂게 웃기만 했다. 아니, 눈치챘기 때문인가?

 

“귀엽잖아.”


역시 알고 이러는구나. 나는 결국 네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결론은 '너 이상한 소리 한다'는 내용으로. 그리고 반쯤 예상하긴 했던 대로, 나는 너와의 논쟁에서 자주 그랬듯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이 기회에 저 애들과 인사라도 나눠볼래? 너 전에 인사해둬야겠다면서, 딱 좋은 기회네.”

“사양할게. 저 둘의 데이트를 방해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거든.”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가며 꼬리를 말자 네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어린다. 어련하시겠어,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 볼을 꼬집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물론, 나는 잠깐의 감정에 휩쓸려 네 말이라면 껌벅 죽는 '애들'의 존재를 잊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그저 대체 그 웃음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소극적인 대처를 했을 뿐이다. 너무 약한 반격이었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네게서 뾰족한 답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사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어.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다지 안 기뻐하고 너는 흥미진진했을 생각이었겠지. 이거 어디 저런 '애들'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내심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내 얼굴에는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나는 너와의 이런 사소한 농담따먹기가 몹시도 즐겁다. 과거의 나는 왜 이런 젊음을 미처 누리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울 정도야.


“라이달, 넌 꽃 좋아해?”


즐거웠던 꽃 채집을 마치고, 실수로 뭉그러뜨린 꽃송이들을 네 눈치를 봐가며 슬쩍슬쩍 버리고 있을 때였다. 나로서는 따라하기 힘든 섬세한 손놀림으로 꽃들을 자루에 담던 네가 문득 던져온 질문은 다시 오늘의 처음으로 회귀해 있었다. 저 먼발치에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마냥 멀게만 느끼고 있었을 그 때로. 과거의 내가 대답했다. 꽃은, 불편해. 겨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나왔을 그 대답은 목에서 탁 막혔다. 왜? 내겐 항상 당연한 감정이었던 그 답이 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꽃을 내려다보았다. 의식하지 않을 때 미처 몰랐던 꽃향기가 훅 끼쳐왔다. 달콤했다. 손톱 끝에 풀물과 꽃물이 얼룩덜룩 배었다. 싫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질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멀게만 느꼈던 꽃이 겨우 하루아침에 달라보인다는 것이 얼떨떨하긴 하지만, 그 감정조차 싫지가 않다. 내가 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분명 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직은 그렇게 좋은 걸 모르겠어. 하지만 싫지도 않아. 이건, 내가 네게 기대했던 많은 처음 중 하나인 걸까. 결국 나는 꽃을 좋아하냐는 네 물음에 지극히도 평범한 답을 들려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음,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네. 보기는 많이 봤지만 내가 꽃으로 뭘 하는 것도 아니고. 넌?”

“나도. 근데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예쁘다고는 생각했었어.”

“처음 볼 땐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언제가 처음이었는데?”


사실 '누구나'라고 하면서도 약간 찔리긴 했다. 내 처음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저게 꽃이구나, 먹을 수는 없고 향은 있다는데 잘 모르겠고 쓸모는 별로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미련 없이 지나쳐버렸던 기억이 전부다. 어지간히 삭막한 꼬맹이긴 했지. 언젠가 했던 것도 같은 생각을 하며 꽃을 본 것은 언제가 처음이었냐 물었더니 너는 '누구 집에서 선인장 꽃을 봤었을 때'라고 했다. 집에서 봤다는 걸 보면 사막을 벗어난 후가 아닐까 싶은데, 하필이면 선인장 꽃이 너의 처음이었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는 사막의 자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선인장 꽃을 그리는 것일까. 네 시선이 또다시 아련해진다.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먼 곳을 보는 너를 보고 있자니 네가 그리워하는 것이 다만 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하찮고 가벼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소중하고 절박한 것일수록 그리워하는만큼 너를 무겁게 짓누를 테니까. 나는 그렇게 바라며 기도하듯 차곡차곡 꽃을 담았다.


“힘들어?”


준비한 자루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꽃을 챙기고도 너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은 건지. 궁금한 마음에 슬며시 네 시선을 따라가보지만 그 끝에 닿는 것이라고는 평원을 초토화시키는 두 악령들뿐이다. 저 꼴을 보고도 멈출 생각을 않는 걸 보면 그들을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엇을 보는지는 몰라도 너는 꽤나 평화로워 보였다.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 미안할 정도로.


"일으켜줘야 돼?”


그냥은 좀 낯간지러워서 밉살스런 말을 내뱉은 뒤에야 손을 내밀었다. 실은 아주 좋아서 내민 손은 아니었다. 지금의 네가, 그리고 내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떠나지 않고 싶은 미련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으니까. 내 손을 선선히 잡아오는가 싶었던 네가 나를 그대로 끌어내린 것은, 역시 너도 지금이 아쉬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네 힘에 버티거나 하지 않고 냉큼 균형을 잡고 앉았던 것도 기꺼운 내 마음이 일부 반영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오늘을 쉽게 끝내기가 싫었다.


“조금 더 앉아있다 가자.”


그래서, 나는 그 말이 참 반가웠다.



+

“왕자님이 따로 없네.”


내가 이 말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알면 너는 웃을 테지. 언제가 좋을까, 내일? 모레? 아니면 다음 주쯤? 바나타와 함께 너를 찾아갈 날짜를 가늠해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로 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준 왕자쯤 된다고 하면 네가 어떤 얼굴을 할지. 그 땐, 정말로 네가 덜 숙성된 예언자 정도는 되는 것 같다며 등이라도 두드려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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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 전의 면담

2013. 6. 28. 15:52 | Posted by 로안담

옆구리에 또다시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전날의 흔적이 역력한 복부는 이미 울긋불긋한 피멍으로 덮여 있었다. 크윽. A의 잇새로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희고 섬세한 손가락이 다가와 이를 악문 그의 턱을 억지로 벌렸다.



 "배에 힘을 주세요. 배에 힘을 줘야 목소리가 더 깊이 있게 울리거든요."



 귓가에 속삭이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A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 용서없는 발길질이 날아왔다. C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이 일이 있기 하루 전




 파일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 C는 굳게 닫힌 면담실의 문을 열었다. 말이 면담실이지, 철제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둘이 가구의 전부인 이 곳에는 차라리 취조실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렸다. 책상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침통한 표정을 억지로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한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남자, A.H의 눈가가 발갛게 부은 것을 보고 C는 조금 웃었다. 생각보다 유쾌한 면담이 될 것 같았다.



 "언쟁이 있었다고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낸 C의 말에 A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이렇다 할 변명도 없이 대답만 하고 입을 다물자 C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요. 딱히 훈계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면담이니까. 편안히 얘기나 좀 할까요.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라서요."



 A는 선량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를 담담히 마주보았다. 선해 '보이지만' 선하지 않은 시선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꼈다.



 "목격자 증언 및 연구원 미하엘 에른스트의 시말서를 토대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손가락이 파일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얼마나 인상깊었는지 몰라요. 코어가 된 사람까지도 제 바람을 위해 산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당신은 정말 대단해. 선인이라는 평판에 비해 한없이 이기적입니다."



 신랄한 비난에 비해 보기 좋은 미소만이 걸려 있는 C의 얼굴은 마치 칭찬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언행의 불일치는 자체만으로도 은유적이고 명확한 조롱이었다. 말의 내용보다도 그 미소에서 A는 더 큰 모욕감을 느꼈다.



 "대답이 없네요. 인정하는 겁니까?"



 시시하네요. 이러면 면담이 안 되는데. C가 곤란하다는 듯 짧게 웃었다. A는 호의가 전혀 담기지 않은 그 웃음이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신경이 이미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면담, 안 하십니까?"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C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지금 하고 있잖습니까?"


 "면담을 하러 오신 게 아니라 이유 없는 비난을 하러 오신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반문에 따라나온 A의 즉답은 단호한 어기를 띠고 있었다. C의 새카만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이유 없는 비난이라."



 오른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채 잠시 생각하던 C가 이내 천천히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제 보니 자신을 직시할 줄 모르는 위선자였군요.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C의 단단한 군홧발이 A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필이면 오토믹 바디가 아닌 오른쪽 다리였던 탓에 A는 주먹을 꽉 쥐고 아픔을 참았다.



 "누가 감히 상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라고 가르쳤죠?"



 시정하세요, 하고 덧붙이는 C의 목소리는 방금 A을 걷어 찬 사람답지 않게 지극히도 평온했다. 그는 파일을 몇 장 더 넘기며 지나가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계셨다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앉아 있던 A의 눈동자에 선연한 분노의 기색이 감돌았다.



 "코어화된 채 발견되셨다고요."


 "이 상황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한 집 안에서 두부가 함몰된 채 발견되었다는데, 역시 당신이 처리한 거겠죠?"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쾅. 자리에서 일어나 A의 옆으로 다가온 C가 한손으로 A의 머리를 쥐고 그대로 테이블에 찍어눌렀다.



 "보기보다 학습능력이 없군요? 방금 주의를 줬을 텐데요."



 고개가 C 쪽을 향해있던 탓에 A의 시야에는 C의 허리께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A는 C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들려온 C의 목소리에는 진한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사랑, 혹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어디까지 그 지긋지긋한 구속을 할 수 있는지 새삼 놀라워요. 사랑하는 가족의 시체까지도 '가족'의 범주에 넣으려는 꼴이 끔직할 정도예요. 죽어서도 놔주지 않을 정도의 감정이라면 그건 이미 자의적인 연대의 틀을 본딴 족쇄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당신의 이기심이 코어까지 가족의 울타리에 우겨넣는 걸 보고 있자니 당신이 내 가족이 아니란 게 진심으로 다행스러울 정도입니다. 당신의 조부께선 스스로가 코어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실까요? 그것도 그분의 하나뿐인 손자에게."



 한계까지 내려간 A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선 그는 C을 세게 밀쳐 제 몸에서 떼어냈다.



 "그만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C의 발이 날아왔다. 오토믹바디 특유의 묵직한 고통에 A가 입술을 사려물었다.



 "상관에게 명령하는 버릇 고치라고 두 번이나 말했을 텐데, 말로는 못 알아듣나 보군요."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C의 다리가 A의 오른쪽 어깨로 날아들었다. A는 왼손으로 C의 발을 간신히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이 형체도 없이 뭉개지고 말았다. A의 손에 막힌 C의 발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A의 왼쪽 다리가 C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순간에 주고받은 짧은 공방은 일견 A의 우세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 때, 옆구리를 맞고 비틀거리던 C가 옆에 있던 철제 의자를 집어 던지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뛰어들었다. 의자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보호한 A의 복부에 강한 발차기가 꽂혔다. A는 몸의 상단과 중단을 거의 동시에 얻어맞고 뒤로 쓰러졌다. 바닥에 강하게 부딪친 머리가 아찔했다. A의 팔에 맞고 떨어진 의자를 발로 걷어낸 C가 그의 배 위로 올라타자, 쓰러져 있던 A가 C의 턱을 후려쳤다. 그의 입술 안쪽이 찢어져 입 안에 피가 가득 고였다.



 A는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의 옆구리를 옥죄는 단단한 두 다리에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문득 C가 기쁜 듯 웃었다.



 "A 상사, 이제 곧 체벌명령이 떨어지겠군요."



 A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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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시체의 조건

2013. 6. 28. 15:46 | Posted by 로안담

텅. 묵직한 철제 상자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무심코 뒤를 돌아 본 A의 시야에 한 병사가 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반대편 손목을 그러쥐고 있었다. 방금 손잡이를 놓친 듯 보이는 손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이런. A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네도 다쳤나?"



 다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 깔려 있는 물음에 병사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오늘따라 안 다친 사람이 없군. A가 속으로 혀를 찼다.



 "가서 치료부터 하게. 이건 내가 연구실에 전해주지."



 병사가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그는 바퀴 달린 캐비닛처럼 생긴 박스의 손잡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쾅쾅쾅. 박스 안에서 주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력과 도주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양 다리가 절단된 코어가 자신의 관 안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A는 손잡이를 좀 더 단단히 그러쥐었다. 거칠게 흔들리는 박스의 움직임이 마치 생명의 약동처럼 느껴져서, A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무렵, M은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연신 양 팔뚝을 비비며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씨발, 왜 이렇게 안 와. 얼어 뒤지겠네. 40분 전, 약간의 불평-'도대체 어떤 등신같은 새끼가 이 날씨에도 금연구역을 만들어 놓은 거야? 담배 피는 것들은 다 나가 뒤지라고?'-과 함께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다가려던 그는 20분쯤 후면 영하지역에 투입되었던 부대가 코어 샘플을 가지고 복귀하기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차피 나가 있을 건데, 앞에 있다가 만나서 받아올까. 사실 남을 건물 앞까지 마중나가 살갑게 맞이한다는 것은 그의 성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냥 나온 김에 같이 들어가지 뭐.'라는 생각에 M은 시계를 확인하고 건물을 나섰었다.



 헌데 약속된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온다는 부대원은 나타나질 않았다. 빌어먹을, 오기만 해 봐. M은 이를 득득 갈았다. A가 기지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으로부터 20분을 더 기다린 M이 재수 옴 붙었다며 담배꽁초를 휙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코어 운반용 박스를 끌고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한 M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제 오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이 몇 시..."



 언제나처럼 사정없이 상대를 몰아쳤어야 했던 M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뚝 끊겼다. 그때 그 형씨 아냐. 델몬트.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M이 잠시 말을 멈춘 사이, A가 지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자네가 코어 샘플을 기다리고 있었나? 미안하군. 생각보다 부상자가 많아 부대 복귀가 늦어졌네. 밖에서 기다렸나 본데, 춥진 않은가?"



 M은 몹시 떨떠름한 시선으로 A을 바라보았다. 그 때는 눈여겨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벌써 두 번째로 그가 화를 낼 타이밍에 끼어드는-이번엔 본인이 그 당사자였지만- 사내의 계급은 상사였다. 물론 M이 군인도 아닌데 계급이 높다고 봐주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일이병들한테나 시키는 일을 상사씩이나 되는 자가 하고 있는데 화를 내려니 기분이 영 껄쩍지근했다. 씨발, 이건 뭐. 똥 싸다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거, 상사씩이나 되어서 왜 이런 걸 날라?"



 영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던 M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거'라는 M의 단어가 A의 가슴에 콕 박혔다. 그가 별다른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A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부대원들이 많이들 다쳐서. 힘들어 보이길래 오늘만 쉬라고 한 번 해본 것 뿐이네."



 딱히 평소에도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냐, 하고 덧붙이는 A을 보던 M은 콧방귀를 뀌었다. 천사 나셨구만. 딱히 싫을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M은 A가 어딘지 영 불편하기만 했다. 어느 새 건물 입구로 다다른 그들이 출입구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잠시 멈춰섰을 때, 어느새 잠잠해져 있던 박스가 다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럽게 팔팔하네. 물끄러미 박스를 바라보던 M의 시선이 A에게로 향했다. 이것도 아무나 못할 짓이구만.



 "그거 또 그 지랄이네. 그쪽도 짜증나겠어."



 그 한 마디에 A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탕탕탕.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박스를 잠시 내려다 본 A가 M의 검은 눈을 직시했다.



 "짜증나는 게 아니라 불쌍한 거지."



 M로서는 이런 개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불쌍해? '저게'? 성자 나셨구만."



 또다시 코어를 물건 대하듯 하는 말에 A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빈정거리는 M의 말투보다도 그 단어가 훨씬 더 거슬렸다. A는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자네, 말조심하게."


 "그쪽이야말로 말을 똑바로 해야지. 재수없게 영하지역에 있다가 코어가 된 놈이 불쌍하면 또 몰라도, 코어가 불쌍해? 별 개같은 소리를 다 듣겠네. 임시보호센터에 있는 놈들한테 그런 말 했다간 아마 댁을 찢어죽이려고 할 걸?"



 A는 M이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가 말하려는 내용은 이해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M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존나 말 돌리지 마. 알면서 뭘 물어? 당신 설마 코어랑 사람이랑 구분도 못 할 정도로 병신이었어?"



 M의 대답에 A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뭐야, 진짜였어? 그럼 귀찮게 됐네. 미친놈은 피하자는 주읜데. M이 정말로 낭패라는 듯이 얼굴을 짜증스럽게 구겼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A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지 괴로움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코어도, 결국 사람이 죽어서 변한 존재라는 걸 모르나?"


 "말 잘 했네! 그래, 죽었다고. 죽은 사람 몸뚱이에 바이러스만 들어찬 게 코어라고. 잘 아네. 근데 뭐가 불쌍하네 마네 개소리야?"



 M은 A가 이제라도 말귀를 알아들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느새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씨발, 감기걸리게 생겼네. 다 좋으니까 빨리 들어가지?"



 A와의 대화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M의 태도에 A는 가슴 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네는."



 뭐? 다섯 칸 남짓한 계단을 다 올라간 M이 아직도 계단 아래에 서 있는 A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안 올라오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M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려던 순간, 낮게 가라앉은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뭘?"



 M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팍 찌푸렸다.



 "미친, 앞도 뒤도 다 잘라먹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자네는 어떻게 코어가 된 사람과 코어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느냔 말일세. 어떻게 코어에게 최소한의 연민도 갖지 않을 수 있지?"



 A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은 끝에 가서 언성이 약간 높아지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평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한 채, 그는 심호흡을 하며 M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 M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코어들 사이에서 구조된 제네시스이자 ACG의 군인인 주제에 코어에 대해 강한 연민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뭐 이런 가증스런 새끼가 다 있어? M은 올랐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 A의 멱살을 잡았다.



 "이거 또라이 아냐? 코어가 된 사람은 당연히 영하지역에 있다가 뒤진 놈들을 말하는 건데 그게 어떻게 코어랑 같아? 그리고 뭐? 연민이 없어? 미친 새끼. 그 정도면 도대체 그 동안 코어랑은 어떻게 싸웠냐? 아니, 당장 오늘만 해도 니 손으로 몇 놈이나 머리통을 부쉈는데? 코어 죽이는 게 업인 새끼가 나보고 뭐가 어째? 뭐 이런 미친 게 다 있어!"



 M의 얼굴에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건 뭐 위선도 정도가 있어야지. 존나 역겨운 새끼 아냐. 그의 노골적인 표현에 A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코어는 결국 코어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사람 말이야. 비록 그 생명도 잃고 몸의 주도권도 뺏겼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게 사실 아닌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코어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나 최소한의 존중도 없을 수 있지?"



 이를 악문 채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어진 A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M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지랄 마! 아까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코어는 죽은 사람의 몸이라고! 우리가 코어라고 부르는 '그건' 이미 사람이 아냐! 씨발, 니가 연구실 와서 한 번 볼래? 코어 몸뚱이랑 인간 몸뚱이가 얼마나 다른지? 사람 뜯어먹는 짐승이 어딜 봐서 사람인데 이 새끼야! 그리고 너 왜 대답 안 해? 말해 봐. 넌 왜 죽이는데? 넌 코어 왜 죽이냐고 이 개자식아. 왜, 아예 한 놈 한 놈 쏠 때마다 하늘에 기도라도 하냐? 오 신이시여 제가 오늘 한 사람을 또 죽였나이다, 이 지랄이라도 해?"


 "그들을 죽이는 건 사람인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의사에 반한 채로 괴물로서 살아가지 않길 바라지 때문이지, 그들이 무슨 해충처럼 쉽게 죽여 없애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네. 내 말이 틀렸나? 나는 자네가 코어를 실험체로 사용하는 걸 말하려는 게 아냐. 그 역시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하지만 자네는 나와는 달리 완전히 그들을 경시하고 있어. 그게 자네와 나의 차이이고, 난 그걸 참을 수가 없네!"



 빠른 속도로 쏘아붙인 A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M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미친 새끼. 괴물로서 '살아가는' 거 좋아하네. 코어는 살아있는 게 아냐. 애당초 살아 있는 생명도 아니라고. 그냥 죽은 고깃덩이가 살아 움직이는 거거든? 넌 시체 보고 절하냐? 일반 병원에서도 사람 시체로 해부하는 판국에 산 사람 뜯어먹는 시체한테 뭘 얼마나 대우해줘야 하는데!"


 "산 사람 뜯어먹는 시체라니! 자네가 영하지대에 있었어도 그 소리가 나오겠나!"


 "못 나올 게 또 뭐 있는데? 사방에서 시체들이 날 뜯어먹으려고 하는데 씨발 어이쿠 안되셨네요 소리가 참 잘 나오겠다 이 새끼야! 썅, 막말로 내가 코어가 된다 해도 그때부턴 그냥 썩어가는 사람고기라고 이 병신아!"



 분을 못 이긴 M이 A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맞은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한 A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A는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M에게 쏘아붙였다.



 "썩어가는 사람고기라고 했나? 정말로 죽어서 썩어가는 사람고기는 움직이지 않아!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단 말이네!"


 "하! 움직이지 않아? 와 씨발, 그거 존나 큰 차이네! 병신아, 썩은 사람고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때부터 움직이는 거야! 결국은 코어가 되나 아니나 그 몸뚱이 자체는 그냥 시체라고! 시체! 몰라? 이미 한 번 시체가 되면 그걸로 끝이야! 왜, 죽은 사람 화장하면 아예 화형시키는 거라고 하겠다? 개소리 집어쳐! 코어든 뭐든 결국 다 똑같은 시체에 불과하다고! 이미 죽은 사람 몸뚱이에 감정이입하는 니새끼가 병신인 거야!"



 퍽.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M의 오른뺨에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다. 손등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A가 로비에서 보고 있던 다른 군인들이 몰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죽은 가족이 일어나 움직이는 걸 보고도 그 시체가 무덤에 묻혀 있는 것과 똑같이 여길 수 있겠나! 사람이 아니라고! 불쌍하지 않다고! 사람으로서 죽은 시체와 죽은 뒤에도 괴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네가 더 사람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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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2013. 6. 28. 15:41 | Posted by 로안담

 "...오늘이 16일이었나?"


 "예? ..아, 예."



 슬슬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시각, 문득 달력을 확인한 A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놀란 예니세이의 얼떨떨한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A가 벌떡 일어서서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주섬주섬 모아들기 시작했다. 큰일이군. 난처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한 A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이러다 정말 늦겠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아까운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향하는 에이든의 얼굴은 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띠릭



 곧 있으면 강제취침시간인지라 혹시라도 입구가 폐쇄되었을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지하 자료실의 도어락은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익숙한 전자음에 가슴을 쓸어내린 A가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빠른 손놀림으로 챙겨온 서류들의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A는 연신 시계를 흘깃거렸다. ACG의 서류는 모두 기밀로 엄격히 관리되는 것들이라 허가받은 대출 기간 내로 반납하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서류 반납기일을 놓쳤을 때 딸려올 여파를 생각하면, 그가 반납 기일이 오늘이었다는 것을 자기 직전에나마 알아챈 것은 거의 행운이었다. 



 기민하게 움직인 덕인지 금세 모두 반납 처리한 서류들을 들고 책장으로 다가가던 A가 사내를 발견한 것은 그가 먼저 이 쪽을 향해 경례를 붙였을 때였다. 그늘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사내 쪽을 돌아보자마자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연둣빛 눈동자였다. 약간의 경멸과 의미 모를 갈망이 뒤섞인 그 시선은 A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예요, 형은?’



 서툰 첫마디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나름대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A가 온 동네 아이들의 형과 오빠 역할을 도맡아 하는 처지였대도 그 아이만큼 그를 따르는 아이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만큼 정에 굶주렸던 아이가 없었다는 쪽이 맞았다. 그만큼 부모의 정을 갈구하는 아이를, 부모 없이 자라난 A가 안쓰럽게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형, 에이든 형!'



 에이든의 수업이 끝날 때면 기다렸다는듯이 달려와 품에 안기곤 하던 아이는 그에게 있어 친동생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아이다운 떼를 쓰거나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만 A는 그것이 제게 오롯이 쏟아지는 순수한 애정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 맹목적인 관심을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A가 그 자신과 아이의 차이를 간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평생 부모와는 떨어져 살았지만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또 천성이 남을 아끼는 것에 익숙했던 에이든과는 달리, 아이의 두 눈은 항상 고독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A는 그 고독이 얼마나 깊고 공허한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고, 또 그러한 감정이 얼마나 쉽게 일그러질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 무지의 대가는 곧 찾아들었다. A가 스스로의 희생에 가까운 헌신으로 가족에 대한 그만의 집착을 표출하며 자기만족을 해온 것에 반해, 아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주기는커녕 제 손에 쥔 누군가를 놓아줄 만큼의 여유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가족과도 같았던 에이든의 부재를 견디지 못했다. 물론 아이는 에이든의 탓이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너무나 변한 아이를 마주했을 때 A는 그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아이의 시선에 담긴 뒤틀린 맹목에 슬퍼했고, 죄책감을 느꼈으며, 동시에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한편으로는 그만큼이나 저를 원해주었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하기까지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역겨워하기도 했다.



 이 복잡한 감정은 아이, 아니 더 이상은 아이라고 부를 수 없을만큼 자라버린 B가 제 손을 결박하고 그 몸을 겹쳐왔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진한 안타까움과 곤란함을 곁들인 것이 다였다. B는 에이든의 여동생들을 들먹였지만 실상 에이든에게 그녀들은 헌신의 대상은 될지언정 연민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저희들의 오라비와 할아버지의 애정,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서로의 유대감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A가 보다 강경하게 B를 내치지 못한 것에는 여동생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B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훨씬 컸다. 비록 아직 학생의 신분이었다지만 그는 이미 가장이었고, 저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여동생들쯤이야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몰아세웠다가 B가 어디까지 밀려날지 몰라 선뜻 밀어낼 수가 없었다. A는 자신의 부재만으로도 이만큼이나 비틀린 B를 더 이상 몰아붙일 만큼 모질지 못했다. 어쩌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B의 맹목적인 시선이 제 안에서 훨씬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A는 B와의 과거를 떠올릴 때면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지금 눈 앞에 있었다. 에이든의 올곧은 눈동자가 평정을 잃고 흔들렸다.



 "자네..."


 "잃어버린 학생증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책장의 그늘에 가려진 사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 변한 듯하면서도 낯익은 조롱기가 담긴 목소리에 A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학생증. 그와의 마지막 밤 이후, B가 제멋대로 가져가 버린 유일한 물건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의 통증에 눈을 감고 싶었으나 A는 제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내뱉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름이, 뭔가."



 띄엄띄엄 새어나온 목소리에 상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알면서 뭘 물어?"



 정말로 뭐 하러 이런 짓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보고서야 상대를 확신한 A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생사를 알지 못한지도 오래,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피하고 싶던 상대를 만나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잠시 후 눈을 뜬 A가 억지로 입을 떼었다. 스스로도 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B."



 간신히 토해낸 그 부름에 B가 보일듯말듯 미소지었다. 입꼬리만 슬쩍 끌어올린 웃음은 과거 A가 그와 몸을 섞기 전이면 익히 보아왔던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B가 에이든의 어깨를 쥐고 책장으로 밀어붙였다. 에이든의 팔 안 가득히 들려 있던 서류들이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졌다. 아직 재회를 실감하지 못해서였는지,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A는 당황하고 말았다.



 “쉿, 조용히.”


 “잠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A가 만류했지만 B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갑작스레 몸이 밀착되자 간편한 실내복을 입고 있는 저와는 달리 군복을 갖추어 입은 B의 계급장이 에이든의 시선을 끌었다. 중사. 에이든보다 딱 한 단계 아래의 계급이었다. 뭔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최소한의 권한은 있으나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권위는 없는 지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곳은 보안이 철저한 서류 자료실이었으며 발 아래 형편없이 나뒹구는 것들은 전부 군사 작전에 대한 기밀 서류들이었다. B의 품 안에 갇힌 자신보다 당장 제 발 아래 떨어진 서류들이, 그리고 그보다도 이 일로 문책을 받을지도 모르는 B가 더 걱정스러워 얼굴을 굳힌 에이든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B가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형. 여전히 이렇게 살아?”



 그 나직한 속삭임에 A는 또다시 과거를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슴이 선뜩해졌다. 습관처럼 에이든의 목덜미에 파고든 B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가 싶더니 이내 아득 이를 세워 깨물었다. 아픔보다는 놀라움으로 크게 뜨인 하늘색 눈동자에 새까만 렌즈가 비쳤다. 천장 위에 붙은 채 공교롭게도 이 쪽을 향해있는 것은 다름아닌 CCTV였다. 셔츠 속으로 차게 식은 손이 파고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A가 B의 손목을 쥐고 옷 밖으로 빼냈다. 그러자 전에 없던 강경하고 단호한 거부에 B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왜, 이젠 못하겠어?"



 B가 뭔가 더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A가 손바닥으로 B의 가슴께를 지긋이 눌러 제게서 떼어내며 말없이 뒤쪽을 눈짓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A가 가리킨 방향을 흘깃 돌아본 B가 다시 에이든을 보고 픽 웃었다.



 "누가 볼까봐 겁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말 해봐야 듣지 않을 거란 것을 잘 알기에 A는 더 이상 B를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서류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한 상태에서 B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간 묵묵히 A가 하는 양을 내려다보던 B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를 주워 바른 순서로 정리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자 단단한 손이 에이든의 턱을 쥐어 왔다. A는 거부하려 했으나,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억센 손길에 억지로 고개가 들리고 눈앞에 연녹색 눈동자가 자리했다. 에이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이는 눈이었다.



 "잘됐네, 증거도 있고."



 싫으면 저거 기록 갖다 바치면 되잖아, 그렇지? 정말로 재미있다는 투였지만, B는 이미 A가 그를 고발할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고발은커녕 서류 건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 사실만은 어떻게든 은폐하려 노력할 것이 뻔했다. 만일 상관을, 그것도 기지 내에서 성폭행한 사실이 발각된다면 B는 끔찍하리만치 엄중한 처벌을 받을 터였으니까.



 "그만 해, B."


 "싫으면 가서 이르라니까?"



 에이든을 뒤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며 B는 진심으로 에이든을 비웃었다. 더 이상 '여동생들'이라는 협박의 수단이 없는데도 알아서 B의 손에 들린 목줄에 제 목을 들이대는 꼴이 한심했다. 그것도 그 목줄이 하필 가해자인 B 자신의 안위라는데야 도무지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위선이 아닌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B는 더욱 속이 뒤틀렸다. 물러 터진 건 여전하네. 가뜩이나 불유쾌한 기분에 B가 기억하는 것보다 필사적인 에이든의 저항이 더해지자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손에 잡히는 에이든의 셔츠자락을 잡아뜯을 듯 움켜쥔 B가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으르렁거렸다. 싫으면, 가서 저거 보여 주라고. 에이든의 눈에 체념의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B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어렸다. 그들은 어차피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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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마주하는 하루

2013. 6. 28. 15:38 | Posted by 로안담

 병영을 나선 A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멎었다.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A는 자신이 길 잃은 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도 가도 좋은 휴가는, 어디도 갈 곳이 없는 그에게 주어지기엔 가혹한 상이었다. 볼을 스치는 버석버석한 바람에 할퀴어진 텅 빈 가슴이 아렸다. 그 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빠? 나 매디!


 "...클로에구나."



 거봐, 오빠는 안 속는댔잖아. 잉, 이번엔 오랜만이라 될 줄 알았는데! 꼭 같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공허하던 A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떻게 바로 알고 전화했네. 방금 나왔어."


 -와, 진짜? 역시 난 오빠랑 좀 통하는 데가 있나 봐.



 클로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매디슨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오빠, 잘 지냈지? 별일은 없구?


 "그래, 다 좋아."



 다 좋아, 라. A가 씁쓸하게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스스로가 거짓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어린 여동생들이 저와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안도했다.



 "아팠다며. 지금은 좀 괜찮아?"


 -언제적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오빠는! 그깟 감기 하루 이틀 아프면 끝이라구.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다며 타박을 하면서도 매디슨의 목소리는 쾌활하기만 했다. 그래서, 오빠야말로 몸 아픈 덴 없어? 지나가듯 묻는 말에 A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제 왼팔을 향했다. 이번 임무에서 코어와 강하게 충돌한 후 칼날의 연결부위가 휘어버려 날을 넣었다 뺐다 하기 영 불편했던 부위였다. 아귀가 맞지 않던 이음쇠가 말끔히 수리된 왼팔을 바라보며 A가 대답했다.



 "응, 없어."



 다친 적은 있는데 수리했어. 여동생에게 말해주지 못할 진실을 속으로만 전해 주던 A는 뭔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다친 게 아니라 고장난 건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부상보다는 고장, 치료보다는 수리가 어울리는 팔을 가만히 보고 있던 A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건강 검진을 하면서 부품을 수리한다는 것이 퍽 우습게 느껴졌다. 확실히, 의료도구라기보다는 공구에 가까운 기구를 들고 다가서던 자에게서는 소독약이 아닌 기름 냄새가 났다.



 -오빠 오빠, 휴가라며! 어디 갈 거야?



 다시 클로에였다. 번갈아가며 앞다투어 말을 하는 쌍둥이의 패턴에는 이미 익숙했기에 A는 놀라지 않았다. 휴가라는 말에 제가 더 들뜬 기색이 역력한 클로에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우리 보러는 못 오는 거지? 아깝다. 뉴욕에 가보는 건 어때? 요새 패션위크잖아! 얼마 전에 맨해튼미술관에서 루브르전 시작했던데 그거 보러 가도 좋을 것 같구. 미리 찾아봤는지 온갖 전시전, 음악회 등을 줄줄 쏟아내는 클로에의 말을 A가 적당히 끊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몇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래, 알았어. 다 가볼 순 없으니까 그 중에서 골라 볼게. 고맙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꼭 가봐야 해?



 모처럼의 휴가인데 재밌게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클로에의 목소리를 끝으로 오랜만의 통화는 짧게 마무리되었다.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A가 전화가 끊어진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았다. 여동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휴가기간 내내 걸려올 전화를 받아주기엔 그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의 주위를 떠돌던 여동생들의 생기가 허상처럼 흩어졌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A가 무의식을 따라 움직였다. 발길이 향한 곳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오는 길에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공동분향소 안은 한적했다. 현실에 가장 치중해야 할 평일 낮 시간에 하릴없이 죽은 이를 그리고 있을 사람이 많을 리가 없었다. 그 몇 없는 방문객 중에서도, 흔한 꽃다발 하나 없이 무작정 발을 들인 사람은 A 혼자뿐이었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훑어가던 A의 발걸음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멎었다.



[Hewer, Frank]



 작은 유리장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곱게 내려앉은 만년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금속 특유의 빛을 내는 손가락이 만년필의 윤곽을 가만가만 따라갔다. 구조대에게 발견되어 집을 벗어날 때, 괴사된 손으로도 놓치지 않고 있던 만년필이었다. 한때는 집에서 유일하게 들고 나온 물건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그런 감정마저 희미했다. 할아버지의 유품은, 결국 A에게 할아버지의 부재를 각인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A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이 다였다. 보고싶다는 말 한 마디조차 선뜻 나오질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그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던 이를 잃었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자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곱씹고 또 곱씹어서, 이젠 아무리 헤집어도 진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문 상처. 그 위를 새삼 긁어 보아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 보고싶다 말해 보아도 정작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이제 A는 제가 죽은 이를 그리워하기는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헛헛한 마음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기댈 데 없는 나약한 자신의 증거에 불과한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제 감정의 색깔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외롭네요, 할아버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불쑥 튀어나온 말이 뒤늦게 그를 덮쳤다.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 낯익은 군복을 입은 자가 이 쪽을 향해 있는 것이 언뜻 보였지만 A는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A는 저를 마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 마주쳤던 주제에 분향소 바로 앞의 바를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사위가 어둑해질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있던 터라 상대가 여태 근처에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아마 토벌부대였던가. 언젠가 직속 부하인 아이엘에게 룸메이트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A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적어도 A에게 경례를 붙이는 대신 담담한 눈인사를 던질 정도의 눈치는 있는 자였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말을 붙였겠으나, A는 제 안으로 침잠하는 자신을 술의 힘으로 달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옭아매고 놓아주질 않는 이 만성적인 공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그림자에 다른 이를 밀어넣고 거짓된 위안을 얻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만일 그가 바라는대로 아직까지 망자의 상실을 이기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 땐 그저 떠난 이의 빈자리를 끌어안고 삭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제 안에 있는 외로움이 그리는 것이 과연 죽은 프랭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요 근래 그분을 생각한 적이 있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술기운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지 A의 생각이 걸러지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당신은 어땠지. 당신도 잃은 사람을 잊지 못해 나처럼 방황했나. 그래서 그 곳에 왔던 게 아니었나.



 "늘, 그렇습니다."



 느릿한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부러웠다. 그래. 그게 맞는 거겠지. 누군가가 그리워 이토록 힘겨운 거라면 매일같이 그 사람을 그리는 게 맞겠지. 그런데 왜 난 그렇지 못할까.



 "상사님은 어떠십니까."


 "...모르겠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내뱉은 대답은 결국 그것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이젠 돌아가신 그분이 보고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내 안에 채워넣을 누군가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 어쩌면, 나를 기댈 사람이 필요한 것뿐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겁이 나.



 "술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A는 대답 없이 제게 쥐어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꽤 마신 것 같은데도 제 안에 얽힌 감정은 선연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혼자였나.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이 단순히 홀로 남은 외로움에 불과한 감정이라 해도, 그를 달래줄 누군가를 찾아 의지할 성정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글펐다. 아까는 뿌옇기만 했던 생각들이 선명한 말이 되어 가슴 속을 맴돌았다.



 할아버지, 저는 더이상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당신은 여전히 그립지만 그 때문에 아프지는 않아요. 이제 제 고독에 당신을 핑계삼을 수도 없는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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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2013. 6. 28. 15:34 | Posted by 로안담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하지역에 발을 들이는 기분은 마치 미지의 정글이나 깊은 심해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도 비슷했다. 예견된 위험과 예측불허의 위기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사실 별반 다를 것도 없었으니까. 단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시시각각 다가드는 위협에 대한 경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뿐이었다. 자연이 잉태한 강자인 맹수나 상어에게 느낄 법한 순수한 감탄을 코어에게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A 자신도 그러했다.






+

 "상사님, 저 앞에 코어에 대항한 흔적이 보입니다."



 전방을 주시하던 비스마르크의 이병 하나의 보고가 들려온 뒤, A의 험비에 타고 있던 네 사람의 투입 허가가 떨어지는 데는 단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네 사람이 차에서 내려 다가간 작은 상가 건물 입구에는 자재가 잔뜩 든 상자나 가구, 심지어 가스통들까지 끌어다 잡다하게 쌓아 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침입을 막기 위해 급하게 만든 티가 나는 바리케이트에는 살기 위한 절박함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A의 마음이 절로 조급해졌다. 어쩌면 이 안에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한 지점을 골라 장애물을 치우기 시작한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가장 전방에 서서 흙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무거운 장애물을 옮기던 이병 제레미가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철골이 든 상자를 밀어내던 A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커다란 책장 아래에 깔려있다가 풀려난 코어 하나가 제레미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마침 조종할 수 있는 분량의 흙을 전부 짐을 들어올리는데 사용하고 있던 터라 대응할 방법이라곤 무기 뿐이었던 제레미는 처음 겪어보는 위기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레미 이병!"



 A의 곁에 있던 비스마르크의 일병, 조쉬가 제레미의 이름을 부르며 M4A1을 겨누었지만 곧바로 따라나온 A의 제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총대를 위로 치켜올려 사격을 막은 A가 다급하게 외쳤다.



 "가스가 폭발할 수도 있어! 함부로 쏘지 말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제레미가 엉거주춤 총을 들어 쇄도하는 코어의 손을 막으려 했다. 막 코어의 손아귀가 어설프게 앞을 가로막는 총대를 낚아채려는 순간, 갑자기 코어의 얼굴이 억지로 쥐어짠 듯 일그러지더니 산산이 터져나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지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물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동료의 생명을 구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A마저 미간을 찌푸릴 만큼 잔인하고 기괴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 제레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 역시 비단 죽을 뻔 했다는 상황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제레미 밀러, 정신 똑바로 차려."



 걱정이 아닌 짜증만이 담긴 목소리에 A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쳐다보았다. 네이슨 버클리. 비스마르크 ACG부대 소속의 일병으로 사물을 왜곡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대놓고 사람을 짐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제레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레미를 노려보는 네이슨의 눈매가 보통 사나운 것이 아니어서, A는 초반부터 삐걱거리는 대원들을 보며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켜야 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바리케이트를 치우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들어가 본 상가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핏자국이 묻어 있고 판매대가 죄다 쓰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코어의 침입에서 자유로웠던 것이 아닐텐데도 상가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A의 눈에 가슴께까지 오는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손을 들어 노크하듯 두어 번 두드려보니 안의 공간이 생각보다 넓은 듯 내부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를 살짝 돌려 보았지만 안에서 잠긴 듯 중간에 철컥 하고 걸린 뒤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다른 대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할때, 마침 계단 쪽으로 향했던 네이슨과 조쉬가 다가왔다.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철문이 안쪽에서 잠겨 있고 그 뒤에 무거운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가? 이 쪽도 막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찾아낸 참인데."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장애물을 설치한 2층 먼저 살펴보는 게 좋으려나. 어느 쪽을 먼저 확인할지 고민하던 A의 귀에 도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투적인 어조에 확인하지 않아도 네이슨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둘씩 나누어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오는 네이슨은 어떻게든 코어를 해치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마자 A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 자는 지금 우리가 왜 험비에서 내렸는지 잊고 있는 게 아닐까. 우연히 그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생존자를 찾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일 뿐, 그들의 의무는 주변 지역을 탐사하는 것이지 코어와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A 혼자만이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카운터 타입이 세명이나 되는데 다 같이 갈 필요도 없질 않습니까."



 거기다 프로토 타입인 A을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까지. 실전이 처음이라더니 이런 뜻이었나? A는 슬며시 헛웃음이 나왔다.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의미로 사기충천한 일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던 A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자네는 나와 같이 가지. A가 덧붙인 말에 네이슨이 싫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했다.



 제레미와 조쉬를 2층으로 올려보낸 뒤 네이슨을 이끌고 들어간 지하실은 놀랍게도 방이 아니라 좁고 긴 통로였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더듬어 보니, 지도에서 확인했던 상가 건물 뒤의 큼직한 창고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꽤 긴 통로를 걸어가는 내내 A는 의문이 들었다. 안쪽에서 잠갔다는 건 결국 상가 건물에서 이 통로를 통해 도망쳤다는 뜻인데, 통로 안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다. 이렇게 소리가 울리는 공간에서 생존자가 있거나 코어가 있다면 분명히 알아챘을 텐데. 그렇다면 그 말은 곧 생존자들이 창고로 도망쳤다는 뜻일까? 어째서 안전한 통로 안에 숨어있지 않고 창고로 가서 몸을 숨겼을까? 창고 쪽 입구는 안에서 잠그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통로의 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상가 건물에서 내려올 때와 똑같이 생긴 단단한 철문이 바깥에서 잠겨 있던 것이다. 즉 코어와 마주칠 때까지 아직 코어화가 되지 않았거나 혹은 제네시스가 된 사람들이 이 문 너머로 몸을 숨겼다는 사실을 확인한 A가 네이슨을 불렀다.



 "그럼 돌아가세."


 "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네이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A가 미련없이 돌아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창고에 숨은 사람들이 코어화가 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네와 나 단 둘이 이 앞을 뚫고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네. 돌아가서 토벌부대와 구조부대에게 이 사실을 알려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하고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이 나아."



 차분한 어조였지만,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한 A의 말에 네이슨이 짜증스럽게 철문을 발로 쾅 찼다. 시멘트벽으로 이루어진 통로 전체에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퍼졌다. A가 미적미적 그를 따라오는 네이슨에게 한 마디 하려고 고개를 막 돌렸을 때였다.



 -쾅!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철문 너머에서 커다란 소리가 되돌아왔다. 철문 한귀퉁이가 살짝 우그러질만큼 강한 충격에 네이슨이 반사적으로 기관단총을 들어올렸다. 좁은 통로의 폭과 엄폐물 하나 없이 드러나 있는 시멘트벽을 떠올린 A가 네이슨의 손을 잡아내렸다.



 "안 돼, 이 상황에서 그렇게 쐈다간 유탄에 자네나 내가 먼저 맞을 걸세."



 말하면서도 이런 기본적인 내용 하나하나까지 짚어줘야 하나 싶었지만, 어찌되었든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A는 최대한 빨리 이 난국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일단 나가세, 어서!"



 쿵, 쿵, 쿵. 그 와중에도 계속 철문을 두드리는 힘은 점점 거세어졌다. A는 더이상 지체했다간 정말 위험해질거란 판단이 들어 네이슨의 팔을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그들이 막 속도를 높여 통로를 달리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철문이 떨어져나갔다.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긴 통로 안이 두 사람의 가쁜 호흡으로 가득찼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히면서도 숨소리 하나 없이 달려드는 코어가 소름끼쳤다.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바짝 따라붙은 코어를 향해 A가 군용나이프를 내질렀다. 순간 코어가 확 달려드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이프가 안구를 뚫고 나가 두개골을 관통했다. A는 뼈에 단단히 박혀 쉽게 빠지지 않는 나이프를 미련없이 놓은 채 달렸다. 먼저 지하통로의 입구에 다다른 네이슨이 몸을 반쯤 빼낸 상태로 A의 코앞까지 다가온 코어 둘의 머리를 으깨는 사이, A는 자유로운 손으로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쯤이면 무전이 될 것이었다.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도 행운의 여신은 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여기는 포인트 B-35, 포인트 B-35 지원 요청한다!"



 무전의 기본 매뉴얼이고 뭐고 싹 무시한 채 제 용건만 외친 A가 벽을 박차고 왼쪽에서 날아드는 코어를 보고 왼팔에 장착된 칼날을 세웠다. 그 날에 머리를 정통으로 들이받은 코어가 나가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달려가던 A의 몸도 옆으로 튕겨져 나가 벽에 부딪혔다. 사정없이 부딪힌 몸도 몸이었지만, 벽지도 없는 시멘트벽에 세게 박은 머리가 아픈 수준을 넘어서 어찔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들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A는 입술을 아득 깨물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모질게 물어뜯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무뎌진 감각 탓인지 그저 정신만 차릴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이 다였다. 억지로 주의를 돌린 A가 그 사이 꾸역꾸역 몰려든 코어들을 간신히 피해 통로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드디어 유탄의 위험에서 벗어난 A과 네이슨이 각각 벽과 철문 뒤에 몸을 숨긴 뒤 통로 안쪽으로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맞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접근만 저지할 수 있으면 되었다. 안쪽으로 섬광탄을 터뜨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사이에 두 사람이 험비를 세워 둔 곳까지 안전하게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2층으로 올라갔던 조쉬와 제레미에게 코어들이 몰릴 가능성도 있었기에 A는 초조한 마음으로 지원이 오길 기다렸다.



 몹시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자 건물 안으로 달려오는 한 무리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토벌부대였다. A과 네이슨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코어들이 계속 밀려 나오는 지하통로의 입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토벌부대들이 좁은 통로 안에 가득찬 코어들을 처리하는 사이 옆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A과 네이슨 쪽으로 용케 토벌부대의 포위망을 벗어난 코어 하나가 기어왔다. 아니, 굴러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 코어는 허리 아래가 잘려나가고 팔도 한쪽밖에 없었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팔로도 그 왕성한 파괴욕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코어를 보던 네이슨이 갑자기 화가 치밀었는지 걸쭉하게 욕을 뱉었다.



 퍽. 총도, 나이프도, 능력도 사용하지 않은 채 네이슨이 코어의 머리를 발로 찍어눌렀다. 코어의 팔이 버둥대며 네이슨의 다리를 잡아 뜯으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을 알아챈 네이슨이 나이프로 코어의 팔뚝을 꿰어 바닥에 고정시켜 버렸다. 누가 보기에도 화풀이인 그 행동에 A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이슨을 말리려 한 발짝 다가가자 바닥에 짓눌린 코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체구를 보고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기껏해야 열서너 살밖에 안 먹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비록 맑은 연둣빛 눈동자의 초점이 없고 붉은 머리는 온통 산발이 되어 있는데다가 주근깨가 박힌 가무잡잡한 피부는 피와 점액질로 더려워져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코어를 보자 A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지쳐서였을까, 불쾌한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A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그만두게."



 그 서늘한 어조에 네이슨이 움찔 놀라 고개를 든 순간, 한 남자가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씨발, 너 돌았냐?"



 다짜고짜 욕과 함께 네이슨의 멱살을 휘어잡은 사내는 A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자였다. B가 네이슨의 멱살을 쥔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너 돌았냐고 이 개새끼야!"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있는대로 인상을 쓴 B와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네이슨의 대치에 A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물론 보나마나 '저 B'를 네이슨이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때려도 곱게 안 때리고 맞아도 곱게 안 맞을 두 사람의 실랑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끔찍했다. 아니나다를까, B가 네이슨의 말꼬리를 잡고 한껏 비꼬았다.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아? 뭘 했냐고? 니가 뭘 했는지 니가 모른다 이거냐 이 병신아? 니가 지금 뭘 밟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거지?"



 그제야 B가 하는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네이슨이 픽 코웃음을 쳤다.



 "지금 코어 하나 밟았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왜, 코어 하나 밟았다고 이 지랄이라 이거냐?"



 B가 네이슨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강한 힘에 고개가 꺾인 네이슨이 채 목을 가누기도 전에 B가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빈정거렸다.



 "지금 내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일병 나부랭이 하나 밟겠다는데, 그럼 이것도 괜찮겠네? 어?"



 네이슨이 반항심 가득한 눈초리로 B를 쏘아본 순간, 안되겠다 싶었던 A가 나서서 B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와 얽히는 것은 A으로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겨우 이 정도의 일이 당장 비스마르크와 라스베가스 ACG간의 문제로 번지지야 않겠지만 어찌되었든 분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인데다가 무엇보다 이곳은 전장이었으니까. 아군끼리 싸움이 붙는 것은 언제나 지양해야 할 일이나, 설령 꼭 다툼이 있어야 한다 해도 그 장소가 이곳이어서는 안 됐다. B가 짜증스럽게 손을 뿌리쳤지만, A가 재차 그 손을 따라가 잡았다. 결국 그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아 댁은 또 왜 이러는데! 내가 이 새끼 좀 조지겠다는데 불만 있어?"



 B는 그 뒤에도 몇 번 더 네이슨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A는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만류했다. 분을 못 참고 씩씩거리던 B가 결국 포기하고 물러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기 부대원들 쪽으로 돌아가는 B의 뒷모습에 A는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라기보다는 지친 숨을 몰아쉰 것에 불과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까 부딪힌 것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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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겨울

2013. 6. 28. 15:28 | Posted by 로안담

 "나는 안 갈란다. 너는 어서 가거라."



 참혹했던 겨울, 할아버지는 매일 그 말씀을 반복하셨다. 너는 어서 가거라. 당신의 목숨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고향 집을 지키겠다던 할아버지의 의지를 나는 감히 꺾을 수 없었다. 서서히 엄습해오는 추위가 끝내는 당신의 숨결마저 얼려버릴 거란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걱정이나 예감을 넘어선 본능적인 확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죽음의 그림자는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지독한 추위가 가져온 흰 빛은 일견 순수해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마침내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할아버지 혼자만이 붉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너는 어서 가거라."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두꺼운 커튼을 겹으로 친 침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고, 나는 임박한 그분의 임종에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늦기 전에 어서 가라는 말씀에 그저 엷은 웃음으로만 답해도 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생각이긴 했지만, 내가 이미 당신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



 바람 소리를 타고 흐릿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슬그머니 침실의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침실에 달기 위해 커튼을 떼어낸 거실 창문은 지옥으로 통해 있었다. 비명소리가 난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다를까, 사람의 탈을 쓴 야수들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만찬을 즐기는 그들의 흐린 초점과 광포한 움직임, 맹목적인 식욕을 보며 나는 이 공포가 할아버지께는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했다.



 매번 두려움과 역겨움에 몸서리치면서도 나는 잔인한 식사를 훔쳐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외로이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비겁한 나의 속죄였으며, 또한 나의 바람이었다. 언젠가 내가 이 지옥에 몸을 던질 때 누군가 나의 죽음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 나는 내 스스로 저들의 이빨 앞에 목을 내놓을지언정 괴물로 살고 싶진 않았다. 내 가족의 소중한 집이 있는 이 곳에서 나는 괴물이 되어선 안 됐다.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만 보이는 광기와 할아버지의 시트가 경쟁이라도 하듯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가던 그 겨울, 내 소원은 딱 하나뿐이었다.



 '신이시여, 부디 사람으로 죽게 해 주십시오.'



 무신론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떤 종교도 접해본 적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매일 밤, 아니 매 순간마다 신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미 이 모든 악몽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기엔 나는 너무나 지친 상태였으니까.



 무엇이 사람들을 피에 굶주리게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내게 극도의 불안감을 선사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단순히 출입구를 봉쇄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긴, 거동이 불편해 수 년째 집에서만 산다던 노파가 앙상한 두 팔로 눈밭을 기어 다니는 꼴을 보고도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건 내 머리가 점점 이상해져 간다는 증거였겠지만.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 내가 매일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외부와 접촉해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튼튼한 샤시로 된 유리창 두 겹, 얇은 커튼 하나에 두꺼운 채광커튼 둘을 방패막이로 삼은 할아버지에 비해 나는 너무도 '위험했다'. 일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차이가 내 안에서 어떤 짐승을 끌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겉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고,


 내가 사람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괴로웠으며,


 그 사람이 할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 절망 속에서도 나는 꽤나 빠른 시간 안에 이성을 찾았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기민하게 최대한 나와 할아버지의 접촉을 막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때 발휘한 이성은 어쩌면 내 안의 인간성의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짐승이 아니게 하는 가장 큰 무기, 이성을 과시하며 그 존재가 위협당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을 사수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때의 나는 담담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감기가 걸린 것 같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날부터 다락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그 방은 할아버지의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또한 가장 추운 방이기도 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추운 방에서 언 발을 하루종일 주무르면서도 나는 할아버지께 식사를 가져다 드릴 때를 제외하곤 절대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할아버지와의 접촉을 피한 상태로도 나는 아래층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분이 외롭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지 몇 일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내 손에서 빵을 받아먹는 할아버지의 입김이 유난히 차게 식은 듯 느껴졌다. 산 사람의 온기를 이미 잃은 그 날숨에 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내 손에.



 그것은 처절한 사투도, 비장한 희생도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끓어오르는 식욕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한 마리 짐승의 사냥이었고 살기 위한 생명의 몸부림이었다.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추위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손발을 주무르던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려와야 했지만, 집 안 전체에는 기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순간 그 침묵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나도 모를 이유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침묵이 결코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오는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 그래, 긴장감이었다. 공포마저 넘어서는, 거대한 위협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 온 몸에 치솟는 긴장감. 나는 어떠한 두려움도 슬픔도 느끼지 못한 채 본능적인 긴장감만을 전신에 두르고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밤새 얼어붙어 잘 열리지 않는 문이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할아버지의 침실 문을 부수다시피 뛰쳐나온 '그것'이 계단 위에서 문을 연 채 서 있는 날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들어올렸다. 나로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속도로 계단을 튀어 올라온 '그것'이 내 발길질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퍽.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내가 살아난 것은 요행이었다. 코어가 되지 않고 제네시스가 된 것만도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날 내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 코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운이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난 당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중에서 걷어차인 탓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계단을 굴러 내려갔고,  우연찮게도 '그것'이 계단이 꺾이는 부분에 세워 둔 장식장에 머리를 들이박았고, 마침 그 장식장 안에는 단단하고 뾰족한 교회 첩탑 모형이 들어 있었으니까. 사진을 찍고 돌아올 때면 이것저것 사들고 오는 부모님의 습관이 날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이시여, 부디 사람으로 죽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위해서 했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끝내 그 분이셨을까. 아니면 죽기 전에 이미 '그것'에게 자신을 빼앗기셨을까. 그 날 이후로 이 의문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고 있다. 이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 잘 알면서도, 내가 그 분의 마지막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괴롭다.



 "ACG에 지원하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슬픔을 느낄 이가 없기를.



 더 이상은 이 긴 겨울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나길 원치 않는다. 비겁하게 유리창 뒤에 숨어서 '할아버지를 지킨다'는 알량한 자기변호나 하던 나는 결국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할아버지께는 이 겨울이 그분의 마지막 겨울이 되었지만, 내겐 죄책감과 외로움을 덧칠한 겨울이 되었다.



 아프다. 아프다. 그저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하던 겨울이 이젠 더 내 안을 갉아먹는 것이 느껴졌다. 가족을 위한다는 든든한 방패는 사라졌고, 나는 살아남은 죄로 매일매일을 악몽 속에 살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내게 보이는 것은 붉게 물든 겨울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ACG에 자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견딜 것인가, 맞설 것인가. ACG는 겨울 속에서 고통받던 내게 선택지를 내밀었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겨울을 끝내겠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겨울을 하염없이 인내하기엔 나는 이미 충분히 외롭다. 유리창 앞에 선 나는 고독한 관객이었으며, 나를 지탱하던 가족도 이젠 사라졌다. 더 이상은 이 겨울을 참아낼 자신이 없다. 그러니 끝내겠다. 반드시 끝나야 한다.  설사 이 겨울이 나의 마지막이 되더라도, 이 겨울을 마지막 겨울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겨울은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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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를 그리는 밤

2013. 6. 28. 15:17 | Posted by 로안담

망자를 그리는 밤



―M, M.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나는 여느 꼬맹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엄마라는 호칭이 아닌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왜 그러니, V?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녀 또한 언제나 나를 V라고 불렀다. M은 좀처럼 나를 이름 대신 이 녀석이라거나 얘, 아들 등의 호칭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V였다.



―왜 나는 M을 다른 애들처럼 엄마라고 안 부르고 M이라고 불러?



왜 엄마는 나를 우리 아가라고 불러주지 않아? 왜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아?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호칭 하나에 섭섭해하고 울상짓기엔 이미 M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내게 쏟는 정성을 모른 척 칭얼대기엔 나는 제법 눈치가 좋고 영악한 꼬맹이였다. 하지만 내심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제 아이를 밑도끝도 없는 대명사로 부르며 어르는 어미들을 볼 때는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기분이 들곤 했다. 콕 집어서 이유를 묻는 내게 M은 일견 정당해 보이는 이유를 대었었다.



―V, 엄마라는 말은 너무 흔하잖니. 엄마라고 부르면 돌아볼 여자는 수도 없이 많지만 M이라고 부르면 돌아볼 사람은 나뿐이잖아?



실상 의미 없는 변명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수긍해야 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하고 덧붙이며 슬쩍 보여준 그녀의 장난스러운 미소 때문이었다. 나와 꼭 같은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가에 악의 없는 미소가 걸리는 그 순간의 M은 참 예뻤다. 어린 내 눈에도 나의 엄마인 M보다, 소녀처럼 웃는 M은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선뜻 불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M 바보.



결국 내가 볼멘소리를 하는 것으로 짧은 논쟁은 끝이 났었다. 삐졌냐며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오는 M은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나는 속엣말을 삼키고 입술만 삐죽이 내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M이라는 말은 M한테는 너무 흔한 말이잖아. M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많아도 엄마라고 불러줄 사람은 나 뿐이잖아.



하고 싶은 말을 작은 몸뚱이에 밀어넣느라 잔뜩 부풀린 볼을 콕콕 찌르던 그녀의 손가락은 유려하고 섬세했다. 타고난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 손을 나는 좋아했다. 톡톡 두드리듯 볼을 만지는 손길이 간질간질해서, 나는 금세 부루퉁한 기분을 풀고 배시시 웃고 말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나한테도, 엄마라고 불러볼 사람은 M 뿐이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까. 적어도, 당신이 죽기 전에 엄마라고 불러볼 일은 있지 않았을까.



"엄마..."



역시 어색하다. 안 하던 짓은 이래서 하면 안 되나 봐. 그렇지, M? 방 안을 채운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나는 조금 웃었다. 어느새 입술에 내려앉은 눈물이 차가웠다. 혀를 내밀어 핥은 그 눈물의 맛은 몹시도 썼다.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M. 엄마. M. M. 내 엄마. 나의 M.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핏빛을 닮은 탐스러운 적발도, 깊은 숲의 녹음과도 같은 눈동자도. 문득 바라본 거울 속에만 존재하는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입가에 걸린 웃음을 내리쳤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와중에도 달빛을 받아 드문드문 비치던 얼굴이 산산이 조각났다. 손이 뜨끔하더니 이내 질척하게 젖었다. 그저 검게만 보이는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검게 물든 손을 들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슬쩍 핥아본 그 눈물은 여전히 썼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와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M, 당신이 이 꼴을 봤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당신도 나와 같이 웃었을까. 아니면, 조금 울었을까?



아무래도 좋아. 보고싶어.



"보고싶어, 엄마..."



그제야 피맛이 느껴졌다. 상처가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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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의 의료봉사

2013. 6. 28. 15:14 | Posted by 로안담

불청객의 의료봉사



 언제나 느긋해 보이던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한 것은 거의 우연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있는 새벽훈련 도중 마주친 E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파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확신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림짐작에 가까웠다. 비록 옆방의 주인이라고는 하나, 고작 몇 일 전부터서야 멋없는 인사나마 주고받게 되었을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니까. 있으나 없으나 신경도 쓰지 않던 그를 제 주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딱 그때부터였기에 원체 흰 피부가 유달리 창백한지 아닌지를 단박에 알아채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훈련 중에 보이던 E의 움직임은 V의 날카로운 감각을 피해가지 못했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훈련 내내 거슬렸다. 검을 드는 자세로 보아 팔을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왼팔을 들어올리거나 검을 횡으로 그을 때마다 단정한 턱에 굳게 힘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어딜 다쳐도 단단히 다친 게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훈련이 끝나고 땀에 젖은 몸을 씻으러 이동하는 기사들 무리에서 슬그머니 벗어나는 E를 보고 V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집으려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는 모양새를 유심히 쳐다보자 다른 동료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저 V한테 찍히다니 불쌍한 놈이군' 어쩌고 하며 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성가셨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애당초 남의 말을 신경쓰는 성미도 아니었거니와 그 추측들이 사실도 아니었으니까.


 "......"


 몸을 씻고 방 안에 돌아와서도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땀을 흘려놓고 씻지도 않을 정도로 더러운 녀석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어디서 칼침이라도 맞고 온 게 틀림없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벗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지가 젖기 전에 짜증스럽게 등허리를 적신 물기를 닦아낸 V가 제법 긴 머리칼을 한 손으로 쥐고 쭉 짰다. 두툼한 수건이 금세 축축해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던 V는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쩔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일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똑똑,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노크를 예의삼아 해 보았으나 안의 기척은 잠잠하기만 했다. 안 자는 거 뻔히 아는데 이게. 아니꼬운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V가 좀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아니, 두들겼다.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치자 채 세 번을 넘기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여전히 피곤한 얼굴은 한 E가 눈살을 찌푸린 채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용건만 간단히 해."


 대답을 않은 채 무심한 눈으로 E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은 V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가관이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땀에 절은 훈련복을 여민 끈만 대충 풀어놓은 채 그대로 입고 있는 꼴은 정말로 미관상 썩 좋은 것이 못 되었다. 그런 주제에 말도 안 하고 저러고 있단 말이지. 저하고야 그냥저냥 마주치면 수인사나 하고 마는 사이라지만 다른 이들과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실상 그다지 터놓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라 말하려 입을 열던 E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라 나가라 하는 말도 없이 문을 열어둔 채 방 안으로 들어간 E가 침대에 올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가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는 E를 묵묵히 바라보던 V는 발걸음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얼핏 문 닫으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잠시 후, 붕대와 소독약 따위를 들고 돌아온 V가 어느새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 E의 베갯머리에 앉았다. 이불을 확 걷어내고 신경쓰이던 옆구리 부분의 옷을 들추자 E가 숫제 인상을 썼다. 조심성 없이 옷을 걷어올리다 상처를 건드려서인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이 날아왔다.


 "지금 내 흉내내?"


 제대로 치료하기는 커녕 피가 꾸득꾸득하게 말라붙은 자상을 가만히 쳐다보던 V가 E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딱히 그 일을 지금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는 너도 내 흉내냐?"

 "...어쩌다보니."


 떨떠름한 반문에 픽 웃은 E가 모호한 대답을 했다. V라고 해서 그의 사연이 구구절절이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상처 주변을 대강 닦아낸 V가 그 위에 소독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사실 제 상처를 치료할 때는 대개 간신히 상처에 대한 예의를 차렸다 싶을 만큼의 소독약만 찔끔 바르고 마는 V였지만, 그래도 남의 상처니 제대로 해주자 싶어 한 행동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V 자신이 소독약의 정량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저 남들이 저보다 많이 바르더라 하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 남의 상처 치료 따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 소독약을 펴바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한 겹 덧씌우는 것을 본 E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만류하기도 전에 V는 이미 그 위에 거즈를 척 올리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혼자 할 때는 능숙했던 붕대질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없이 서툴게만 느껴져서 V는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돼. 성질같아선 붕대 따위 안 감아도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상처는 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하필 V가 아플 때 도움을 준 상대의 상처. 그 점이 V의 불같은 성미를 꾹꾹 내리눌렀다.


 "붕대 다 흘러내리겠다."


 제 딴에는 아플까봐 슬슬 감는다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붕대가 흘러내리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남의 몸에 붕대를 감아본 적이 없다는 티가 물씬 나는 그 모습에 E는 옆구리가 당기는 것도 잊고 그만 피식 웃고말았다. V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붕대를 좀 더 조였다. 니가 해봐 이 자식아. 좀전보다 힘을 주어 꾹꾹 붕대를 당기는 손에 감정이 실려 있어 E는 옆구리에 손을 얹고 아파하면서도 좀 더 웃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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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잃은 명마

2013. 6. 28. 15:09 | Posted by 로안담


목을 잃은 명마



새벽 특유의 싸한 냉기를 담은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수도의 관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펼쳐지는 멋진 초원이 새벽 어스름 속에서 물결친다.



'그 축생의 힘줄을 끊어버려.'


'잘난 말이 반병신이 된 걸 보면 어떤 얼굴을 할 지 궁금하군.'



쏴아, 쏴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소리에서 희미한 피냄새가 묻어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고즈넉한 감상에 잠길 순간에 섬뜩한 예감을 느끼고야 마는 것은, 결국 기사 된 이의 단련된 직감인가. 아니면―생명을 앗아가기 전 양심이 던지는 마지막 경고인가.



"―――――"



유려한 선을 지닌 명마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에는 굉장히 질척하고, 단호하고, 서늘한 소리가 났다.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잘린 말의 목이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뒹굴고 나서야 머리를 잃은 말의 몸뚱이가 서서히 스러졌다. 섬세한 근육으로 덮인 어린 말의 다리가 휘청 꺾이는 것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슬픈 장면이었다. 그래, 슬펐다. 그 목을 베어낸 V 자신마저 바닥에 애처롭게 늘어진 단단한 다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충분히 건조한 슬픔이었다. 말의 목을 쳐낸 검의 피를 닦기도 전에 날아드는 검의 주인을 베어내고 발로 걷어차는 것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어느 가문이냐!"


"기사 주제에 신분을 숨기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



아무리 평복을 하고 있어도 상대는 용케 이 쪽이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긴, 애당초 제대로 된 제식 검법을 구사하는 쪽이 기사가 아니면 오히려 이상할 터다. 제식 검법이라면 정식 기사가 되려면 누구나 배우고 들어가는 기본 검식이니까. 신분을 숨기기 위해 평소의 버릇이나 습관적인 움직임을 피하고 정석대로 움직이는 V를 상대하는 C의 기사는 꽤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말 못하는 축생을 함부로 베는 놈도 기사라고 할 수 있냐!"



그러게 지금은 기사 아니라니까. 그 말은 입 안으로만 중얼거리며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쳐낸다. 그러는 너희도 결국 말 못하는 짐승 때문에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 게 아니었나?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말 주제에 집 한 채 값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걸 호송한답시고 C 기사단 기사씩이나 되는 것들이 말을 주위에서 둘러싸고 호위해 데려오는 건 그야말로 광대놀음이다. 물론 그깟 말 한 마리 못 샀다고 남이 먼저 채간 말 다리를 끊어 놓으라는 귀족 나으리의 명령도 충분히 치졸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는 저도 역겨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럽다. 어지럽다. 겨우 말 한 마리, 아직 다 크지도 못한 어린 말 한 마리 때문에 이 많은 기사들이 인적도 드문 초원 한가운데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 심지어 한 쪽은 기사의 명예따위 내팽개치고 신분을 숨기려 눈속임까지 한 채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말의 피와 그 위로 흐르는 인간의 피는 섞일 듯, 섞이지 않고 붉은 빛을 더한다.



"...너!"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지는 핏빛의 머리칼.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칼날이 후드와 함께 적발을 잘라내는 것이 느껴진다. 후드를 쓰느라 풀어 놓았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동녘을 밝혀오는 햇살에 비쳐 눈 앞이 화끈한 붉은 빛으로 물든다. 그 특유의 색을 알아본 것일까. 이 쪽을 가리키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C의 기사는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것도 같다. 언젠가 시비가 붙은 일이 있는 자였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S가 시킨 일이었나!"


"더러운 모사꾼 같은 놈들!"



평소라면 질세라 욕을 내뱉을 테지만 그럴 기분은 나지 않는다. 왜일까. 어쩌면 스스로도 제가 앗은 생명에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이 낳은 최상의 신체를 타고나 어린 시절부터 말을 사랑하는 한 귀족의 아낌을 받았고 말에게 가장 좋다는 기후로 유명한 지방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 전부터 저를 기다려온 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그 아름다운 말을 먼저 차지하지 못한 자의 졸렬한 시기에 휘말려 낯선 땅을 박차고 달려보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짐승도 감정이 있다면 억울할 테지. 답지 않게 감상적인 생각까지 하고 말지만 정작 후회는 없다. 바람과 경주하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이 짐승에게 다리의 힘줄을 끊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너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그렇게 비루하게는 살지 마. 그건 인간의 몫이다. 그렇게 되뇌며 목을 베었었다.



"어딜 도망치려는 거냐!"



잡아, 저 놈들 잡아. 그렇게 외치며 뒤를 쫓아오는 저들은 어린 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값비싼 명마를 잃게 된 주인 대신에 화를 내는 것일까. 전자라면 참으로 작위적인 슬픔이며 후자라면 참으로 천박한 분노이겠지. 설마하니 기사라는 자들 중에 순수하게 여린 짐승의 죽음을 슬퍼할 이가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말을 달려오느라 지친 기사들을 절대적인 숫자의 우위로 몰아치고는 아직 생기 있는 이 쪽의 말을 몰아 수도 관문으로 향한다. 다리만 못 쓰게 하라는 명령 대신 아예 그 목숨을 취했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 명령을 내린 자는 상대가 제가 취하지 못한 말을 갖는 것이 싫었을 뿐일 테니까. 여유롭게 추적을 따돌리고 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무고하고 깨끗한 피를 기억할 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 직감의 결과가 다가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아 옛날로그 막 뒤져서 올리니까 흑역사 발굴하는 느낌적인 느낌^^ 돌겠네 진짴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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