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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

2015. 1. 25. 23:16 | Posted by 로안담

유스넬 여제가 온다!’

 

온 신문이며 음성통신망을 시끄럽게 달구는 화제는 단연 이것이었다. 대륙의 반절 가까이 되는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 라딤의 황제가 조만간에 팔라의 수도 사밀 지앙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전 왕국을 뒤흔들었다. 누가 상업국가 아니랄까봐,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이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는데도 사밀 지앙은 벌써부터 고객 유치에 나선 장사꾼들로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그럴진대 왕실 식구들의 사정이 그보다 못할 리가 없었다. 시종들과 시녀들은 거의 편집증이 걸린 것처럼 하루종일 왕궁을 쓸고 닦았으며, 관리들은 임명장을 받은 뒤로 들춰본 적도 없는 정복을 갖추어 입느라 야단이었다(심지어 대부분의 경우는 불어난 살 때문에 맞지도 않았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올 거면 좀 미리미리 알려주지. 시즈 역시 입단 후 옷장에만 처박아뒀던 제복을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상태로 복원하느라 애를 먹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여제가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갑작스레 떨어진 일감을 떠안은 모든 이들의 속마음이 그랬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유스넬 여제다. 그녀가 조금 급박하게 방문 의사를 밝혔다고 해서 항의를 할 수 있는 이는 적어도 팔라 왕국 내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왜 우리까지 가야 하는데? 우리가 거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낸들 아나.”

 

시즈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인 베리가 언제 심드렁한 얼굴을 했냐는 듯 금세 방긋거리며 시녀 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접시에서 은근슬쩍 카나페 하나를 꺼내가자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시녀가 지지 않고 곱게 눈을 흘겼다. 베리의 옆구리를 콕 찌르고 빠르게 멀어져가는 이름 모를 시녀와 베리를 번갈아 본 시즈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예쁘장한 것들이 쌍으로 사랑놀음을 하는 모습은 보기에 참 껄쩍지근했다. 누구는 짝도 없는데. 노골적인 야유가 섞인 시즈의 시선에 베리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너 얼마전에 끼고 있던 여자는 금발이었던 것 같은데….”

“…….”

저 불타는 뒷통수는 뭐냐? 바람둥아.”

 

베리는 대답 대신 조용히 반쯤 베어문 카나페를 시즈의 입에 들이밀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 훤히 보여 고까웠지만 시즈는 군말없이 카나페를 받아먹었다. 어차피 베리가 여자를 갈아치우는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고, 매사에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는 건 베리의 생리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그만큼 왕궁표 카나페가 맛있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단순한 매커니즘에 충실한 그답게 마악 시즈의 기분이 상승곡선을 그리려던 때였다.

 

노가다! 빨리 오라니까 그새 뭘 주워먹고 있어?”

 

고작 며칠사이에 외양만은 그럴듯해진 왕궁 복도 끄트머리에 마찬가지로 겉모습만은 근사한 왕자가 타박을 해왔다. 방금 쑤셔넣은 카나페로 부풀었던 시즈의 양 볼이 더욱 빵빵해졌다. 왜 또 보자마자 시비야? 영 불편한 시즈의 심기를 단박에 눈치챈 베리가 네다와 시즈 사이를 냉큼 가로막고는 넉살좋게 웃어보였다.

 

에이, 왕자님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호오, 연대책임을 지시겠다?”

“…라고 하면서 기어이 먹더라고요. 그러게 제가 말렸는데.”

 

헤헤헤, 하고 속없이 웃는 베리 옆에서 네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죽이 척척 맞는 한 쌍의 간신배와 폭군에게 한 마디 해주려던 시즈는 대뜸 팔을 잡아끄는 네다 때문에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허우적거렸다. , ! 시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 왜 맨날 힘으로 이러세요? 말로 하시라니까요.”

말로 하면 니가 곱게 오냐? 따라오라고 하면 재깍재깍 안 오고왜요? 어디 가는데요? 이거 출장비 나와요?’ 하면서 뭉개고 있을 거 모르는 줄 알아?”

“……왕자님은 왕족이면서 예법 수업 같은 거 안 들으세요? 뭉개긴 뭘 뭉개요.”

 

귀신같은 새끼. 반박할 말이 없어 괜한 트집을 잡자 네다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예법? 예법 좋지. 우리 한번 왕실 예법 제대로 지켜 볼까? 일단 너부터 사형감인 건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구나, 노가다.”

암요. 그러믄요.”

 

시즈가 반쯤 체념한 투로 장단을 맞춰주자 네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막힘없이 탁 터지는 웃음이 덜 여문 소년의 것처럼 청량했다. 얘가 진짜 어리긴 어리구나. 시즈는 실로 오랜만에 네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늘 재수없이 사람을 들들 볶아대긴 해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갓 스물 된 녀석다운 태가 나니 도무지 져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어째 시선이 불손하다?”

설마요.”

 

사실 이길 수가 없는 거긴 하지만. 놈은 왕자고 저는 이름뿐인 기사라는 현실을 새삼 체감하며 시즈가 어물쩍 웃어보였다. 그에 화답하듯 네다가 혀를 쯧쯧 찼다. 저렇게 속이 훤히 보여서야 원. 자못 안쓰럽다는 듯한 그의 시선에 시즈는 조금 무안해졌다.

 

그래서 저는 왜 데려가시는 거예요?”

애 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네다가 아, 하더니 정정했다.

 

애가 아니고 애들이지. 쌍둥이거든.”

……, 왜요? 에스퍼예요?”

 

시즈는 처음으로 떠오른 가정을 제시했다. 사실 그게 아니고서야 레이버 나이츠에 속한 그가 어린애를 돌봐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냐. 간결하게 대답한 네다가 잠시 후 덧붙였다.

 

아마도…?”

아마도요?”

 

시즈가 의아한 투로 반문했다. 네다가 그런 식으로 불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뭘 숨기고 거짓말을 해야 할 신분이 아니라서 그런지, 네다는 어지간해서는 말을 애매하게 흐리는 법이 없었다. 뭐 하나 물어보면 아는 걸 줄줄 쏟아내야 속이 시원한 잘난척쟁이가 어쩐 일로 이렇게 자신 없는 소리를 할까. 그 속이 궁금했던 시즈가 네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국법에 따르면 손가락이나 모가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잘릴 짓이었지만 네다는 그저 눈썹만 꿈틀거렸다.

 

웬일이에요? 왕자님이 모르는 것도 다 있고.”

비꼬냐?”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시즈를 돌아보는 네다는 미미하게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내가 좀 박학다식하지.”

 

네다가 어깨를 으쓱이자 시즈가 장난스럽게 감탄했다. , 왕자님은 진짜 폭군의 자질이 돋보여요. 감언이설에 이렇게 약하시다니. 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폭군 흉내 좀 내 줄까? 어휴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아냐 사양할 것 없어. 두 사람이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사이 주변을 지나는 시종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느새 그들은 출구가 어느 방향인지도 모를 만큼 본궁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커다란 무쇠 손잡이가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하자, 네다가 시즈의 어깨에 팔을 감고 나직이 속삭였다.

 

어쨌든,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안에 있는 게 네 경호대상들이거든.”

아까 그 애들요? 좋은 집 자식들인가 보네요.”

좋은 집은 무슨.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야 떠돌이.”

그럼 집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집 자식들인가 보죠. 그게 아니면 제가 왜 필요한데요?”

 

(시즈 스스로도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지만) 레이버 기사는 가장 높은 수준의 경호가 아니라면 경호 임무에 동원되지 않았다. 말이 좋아기사, 정예인 센트럴 기사단이나 왕립기사단에 비하면 민간인의 전투력에 가까운 그들을 일반 경호임무에 써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ESP를 통한 공격을 무산시킬 수 있는 것이 같은 에스퍼 뿐이라는 이유로 지방 영주 하나 경호할 자격이 없는 레이버 기사들은 종종 왕실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끌려가곤 했다. ‘대놓고 몸빵으로 쓰자는 거지 뭐.’ 베리가 늘상 하는 소리 중 가장 옳은 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네다가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대답 안 하고 넘어가려는 수작이군. 그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라 그런지 시즈는 이제 슬슬 네다의 패턴이 눈에 보였다.

 

하여간, 정신 바짝 차려. 난 경고했다.”

그렇게 위험해요?”

. 비공식적으로 말하자면 지랄 같지.”

 

즉답에 시즈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자 네다가 픽 웃고는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아주 악마새끼들이 따로 없거든.”

 

덧붙이는 것과 동시에 무거운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에 코를 박고 서 있었대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에 동그마니 선 아이의 모습에 시즈가 움찔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작 문을 열었던 네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탓에 시즈는 조금 무안해졌다. 아마 네다가 붙들고 있던 제 팔이 세게 조여드는 감각만 아니었다면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혔을지도 몰랐다. 저렇게 놀랐으면서 얼굴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거야? 겉과 속이 같으면 나 혼자 쪽팔리지도 않고 좀 좋아. 시즈가 괜히 네다를 흘끔거리다 예의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나이 대의 어린아이 특유의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 시즈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시즈는 생각했다. 악마가 아니라 천산데? 어린아이가 갖출 수 있는 모든 사랑스러움을 다 갖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알고 열었냐?”

당연하죠. 문 코앞에서 뭘 그렇게 속닥거려요?”

그게 들려? 여긴 본궁에서 가장 방음이 철저한 방인데. 군사회의에도 쓰는 곳이라고.”

당연히 들리죠. 그치만 그게 아니어도 여기까지 오는 발소리는 들리니까 거기까지만 들은 걸로 해드릴게요.”

?”

“‘공식적으로제가 팔라 왕국의 군사회의를 엿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로이가 그랬거든요.”

 

시즈는 순간 자신이 왕궁이 아니라 어디 나무판자로 된 오두막에 있나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제가 서 있는 곳은 대리석 바닥 위에 두툼한 카펫을 깔아 발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왕궁 복도가 맞았다. 네다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성인 남자, 그것도 네다만한 키의 남자에게는 허리께에도 안 올 아이에게 보내는 것 치곤 조금 고압적인 시선이었으나 아이는 자못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왜 들을 걸 뻔히 알면서 거기서 얘기한 건데요?”

그것도 로이가 그러든?”

.”

공식적으로 우리 얘길 못 들었다고 하려면 우리가 문 앞에서 얘기했단 것도 몰라야 한다는 건 말해주지 않든?”

안 해주던데요?”

 

따박따박 대꾸하던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똑 같은 목소리가 방 안쪽에서 들려왔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는데 노크 하나 없으면 뻔하죠. 작당모의 아니면 작별키스.”

 

쌍둥이? 시즈가 반사적으로 두 아이의 차이점을 찾으려 했으나 옷까지 똑같이 차려입은 둘은 머리를 땋아내린 리본의 색깔 외에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대체 쌍둥이한테 같은 옷을 입히는 부모의 심리는 뭘까. 매일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려고? 시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라색 리본과 청록색 리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다는 나중에 나타난 청록색 리본의 아이에게 조금 더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조금 비열하고 잘생긴 미소를 지은 그의 입술이 아까보다 약간 더 진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왜 전자라고 확신하는데?”

 

청록색 리본이 젊은이의 멍청한 농담을 들은 노인처럼 한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척 꼬는 자세가 상당히 그럴듯해 시즈는 내심 감탄했다. 쟤 하루이틀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때, 그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가 타이밍 좋게 시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즈가 지레 찔린 얼굴을 했다. 인형의 것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나 그만큼 사람의 것이 아닌 냄새를 풍겼다. 천사처럼 고운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표현이었지만, 시즈는 그들과 잠깐 시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짐승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자였으면 연애 안한지 최소한 3년은 된 저 형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죠.”

그걸 어떻게…?”

 

이달 초를 기점으로 딱 3년째가 되는 시즈가 입을 떡 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지난번 애인과 헤어졌던 일은 그가 레이버에 들어오기도 전의 일이었으니 왕실에 아는 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 멍청한 표정에 보라색 리본이 까르르 웃더니 청록색 리본이 앉은 소파 등받이에 사뿐히 뛰어올라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제 키만한 높이를 준비운동 하나 없이 올라가는 동작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장난치듯 허공에서 다리를 붕붕 휘저은 아이가 앞뒤로 몸을 까딱였다. 시즈는 농담으로라도 위험하니 내려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아이의 몸짓은 제가 감히 구현할 수도 없는 영역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던 것이다. 제 자매인지 형제인지가 보이는 놀라운 움직임에도 청록색 리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던 대화를 계속했다.

 

지금 왼손 약지에 낀 반지는 어떻게 봐도 여자 반지예요. 그것도 세공 상태나 모양으로 봤을 때 결혼반지 아니면 적어도 약혼에나 썼을 만한 거고요. 보아하니 맞는 손가락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저기에 낀 것 같은데그 정도로 절박하게 가지고 다니려는 걸 보면 유품일 가능성이 높네요―, 보통 남자 반지는 저것보다 훨씬 두꺼우니까 최근까지 본인 사이즈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면 손가락에 자국이 남았어야 해요. 즉 적어도 최근 일년 안에는 반지를 끼지 않았단 뜻이죠. 그렇다면 일단 반지를 나눌 정도의 연인이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허리띠에 걸린 그 체인, '헌터 체인'이라고 해서 사냥터에 가는 귀족들이 연인에게 받은 보석들을 줄줄이 끼워놓고 다니던 거예요. 많으면 많을 수록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냥을 할 수 있다나 뭐라나 해서 한 5년 전쯤 엄청나게 유행했죠. 그랬더니 기사들도 귀족들을 따라서 반지나 손수건, 기사패 같은 명예롭고 부피만 차지하는 쓰레기들을 걸어둘 용도로 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대충 기른 머리나 안 다듬은 눈썹, 직접 다린 게 분명한 셔츠단추 옆을 잘 다렸어야죠를 봤을 때 저 형이 그렇게 사교계 트렌드를 잘 따라가는 부류 같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겠죠?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다는 뜻이죠. 보나마나 여자. 애초에 헌터 체인 자체가 연인에게 선물받는 남자들의 자존심 같은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여자 것으로 보이는 반지는 손에 끼고 있고 대신 수갑이랑 아이콩, 왕궁 건물용 열쇠가 헌터 체인에 걸려있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형 얼굴에는 뺨 맞은 자국도 없고 손톱자국도 안 보이네요. 다시 말해 지금은 그 여자가 곁에 없단 뜻이죠. 어떤 여자가 자기가 준 헌터 체인으로 저런 짓을 하는 걸 가만히 두겠어요?

 

결정적으로 저 끔찍한 부츠는 이젠 어디서 사려고 해도 못 사는 골동품이에요. 자기 애인이 저런 걸 신고 다니는데 말리지 않을 여자가 있을 것 같아요? 고고학자도 그건 못 참을 걸요."

 

그래서 5년 전에 너는 도대체 몇 살이었는데? 시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얼굴로 혀끝까지 올라오는 물음을 꿀꺽 삼켰다. 네다가 웃음이 터질 듯 말 듯한 얼굴을 한 채 시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다가 문득 조금 자존심 상한 투로 내뱉었다.

 

, 참을 사람이 있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정말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지금도 당장 한 명이 생각나는데.”

여자 맞아요?”

 

영악한 자식. 네다가 속으로 아홉 살짜리의 흉을 보며 자신 있게 미소지었다.

 

그럼.”

 

로이는 조금도 네다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쌍둥이는 그로부터 약 두 시간 가량, 현란한 혓바닥과 동물적인 균형감각으로 시즈의 정신을 쏙 빼놓고 난 뒤에야 오후 간식을 먹겠다며 사라졌다. 내가 방금 본 게 뭐였지. 시즈는 네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설마 날 여기 또 두고 갈 거란 말은 하지 말아 줘. 네다가 시즈의 절박한 표정에 멈칫했다가 이내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웃어요? 지금 웃어?! 시즈가 울컥 화를 냈다.

 

이 배신자!”

어허, 무엄하다.”

무엄하긴 개뿔이, 일부러 나만 놓고 간 거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당연히 일부러 너만 남겼지. 경호원을 두고 갔음 됐지 내가 같이 있어줄 이유가 뭐 있는데?”

보니까 경호원도 필요 없겠더만! 걔네 진짜 에스퍼 아니에요?”

 

네다가 또다시 푸학, 하고 체신머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지만 보기에만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저 웬수. 시즈가 네다를 노려보자 네다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추스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거짓말!”

 

시즈는 이때만큼 네다를 불신해 본 적이 없었다(기억 어딘가에 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시즈는 과감하게 과거를 부정했다). 네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짜 아니래도. 시즈는 말도 안 돼라고 있는 힘껏 외치는 대신 입을 쩍 벌렸다. 네다가 정통으로 마주한 시즈의 목젖을 보고 질색하며 시즈의 입을 닫아주었다. 꼴에 왕자라고 이상한 곳에서 비위가 약하다니까. 시즈가 머쓱하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럼 걔네는……뭔데요?”

 

빈말로도 '누구냐'는 말이 안 나와 그리 묻자 네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천재지 뭐긴 뭐야.”

천재요?”

 

그게 천재라는 말로 커버가 될 영역이야? 여자애는 막 샹들리에에 훌쩍훌쩍 뛰어올라가던데? 남자애는더 생각하기도 싫어. 갓 잡아온 야생 원숭이마냥 가구 사이를 종횡무진하던 소녀와 천사 같은 얼굴로 어른의 속을 후벼파던 소년을 떠올리자 시즈는 절로 울적해졌다.

 

하긴, 천부적이긴 하더라고요.”

 

사람 괴롭히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던데. 시즈가 음울하게 덧붙이자 네다가 머리를 쓱쓱 헤집었다.

 

조금만 더 참아봐. 걔들 보호자가 곧 올 테니까.”

그거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반가운 소식이네요. 언제 오는데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

저 욕해도 돼요?”

 

네다가 심술궂게 웃으며 시즈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시즈가 마음껏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왕궁! 욕 하나 내 마음대로 못 하고! 콱 무너져버려라! 우웁, 우우웁. 입이 막힌 채로 얼굴이 빨개지도록 용을 쓰는 시즈를 보며 네다가 폭소했다.

 

, 사직하고 싶다. 돈만, 하다못해 먹고 살 재주만 있었어도. 시즈가 침통하게 왕궁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살이 포동포동한 우량아 아기천사가 속도 모르고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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