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세이어 성국이 코앞이었다. 발 디딘 자의 왕이 다스리는 성역을 불과 수 킬로미터 남짓 남기고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는 성왕聖王의 성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빛은 무슨 빛이야, 그냥 흰색이라서 밤에도 보이는 거구만. 창倀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어디에서 왔소?”
경비대원이 무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창은 굳건한 성벽 너머로 얼핏얼핏 비치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았으나 언제나처럼 못 본 체 했다. 그는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는 일행을 대신해 대답했다.
“오얏 반도에서.”
오얏 반도라고? 입술 언저리에 퍼런 수염자국이 선명한 어린 경비대원은 익숙지 않은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애송이로군. 창이 먼저 생각했고, 그 다음이 옆에 섰던 칼잡이의 차례였다. 애송이네요. 영문을 모르는 경비병은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짜증 섞인 시선으로 멀뚱멀뚱 그들 일행을 쳐다보았다—그나마도 창의 퍼런 귀광을 품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곧장 검자루로 손을 가져가는 바람에 짧은 시선교환에 그치고 말았지만. 하지만 경비대원은 그 검을 감히 뽑아들지는 못했다. 창의 뒤에 섰던 칼잡이가 어느새 로브 소맷자락 아래로 꼬나든 단검을 턱 아래 들이대고 있었던 탓이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이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고 다가온 다른 경비대원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눈짓조차 제때 이해하지 못하는 신출내기 경비대원 대신 칼잡이가 선수를 쳤다.
“출발지를 말하라기에 답했을 뿐인데 이 분이 영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짐짓 쾌활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쾌활함에 부합하기라도 하려는 양 칼잡이가 단검을 핑그르르 손 안에서 돌렸다. 악, 하는 비명이 어린 경비대원의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두 번째로 다가온 경비대원은 섣불리 일행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바닥에 떨어진 두꺼운 출입대장을 천천히 펼쳐 탁자에 올리고(그것은 도저히 손에 든 채로 뭔가를 기입할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칼잡이가 한 것처럼 손 안의 펜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하면 삿된 것을 적어도 부정타지 않는다는 흔한 미신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아는 칼잡이는 침묵했고 창은 희미하게 조소했다.
“그래서 어디요?”
“오얏 반도.”
먼젓번 다가온 경비대원의 삼촌뻘은 되어 보이는 두 번째 경비대원도 ‘오얏 반도’라는 말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그의 동료보다는 훨씬 덜 막연하고 더 은밀했다. 노련하게 혐오를 갈무리한 경비대원이 출입장부에 이방인들의 출발지를 기록했다. [자드유스 반도]
“둘 다?”
“이쪽은 오디 연합.”
갈수록 태산이로군. 경비대원은 창이 가리킨 칼잡이 쪽을 흘끗 보고는 내심 진절머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오단 리 연합]
“이름은?”
경비대원이 지극히 사무적으로 물었다. 의도적으로 감정을 거세한 탓에 그의 목소리는 흡사 말조차 섞기 싫다는 투로 들렸다. 그러나 마냥 무관심을 가장하던 경비대원도 칼잡이의 이름에 가서는 다시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성이 없다?”
“천인이라서요.”
칼잡이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자 경비대원이 더 말을 잇는 대신 출입증을 건넸다. 이번에도 마냥 기다리는 칼잡이 대신 창이 손을 내밀어 출입증을 받아 들었다. 그와 손이 닿지 않으려 애쓰는 경비대원의 꺼림칙한 손동작이 영 보기 거슬렸다.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문득 눈이 마주친 칼잡이가 심술궂게 웃었다.
“레이번, 왜 굳이 그런 말을 했어?”
어차피 산사의 이름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산사 중에 본명을 쓰는 이는 지극히 드물었으니까. 그러니 대강 거짓 성을 대어도 되었는데도 레이번은 굳이 성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모자라 모두가 쉬쉬하는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했다. 천한 인간, 천인. 망량을 쫓아낸 위대한 두 왕과 신녀가 나타나 모든 인간을 한 자리에 올리고 귀애하기 전, 천형이라 불릴 정도로 혹독한 신분제의 희생양이 되었던 천출의 후예를 비꼬아 이르는 말이었다. 눈에 보이는 신분제가 없다 하여 천하게 여기는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꼭 지금은 천인이 된 천출을 향한 혐오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저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누군가를 반드시 필요로 했고 우연찮게도 천 년의 태평성대 내내 천출이 만인지하에 있어왔던 것뿐이다. 전쟁이 종식되고 천인의 사회적 입지가 날로 높아져가는 지금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산사가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그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니 그들이 똑똑한 것이지요.”
“뭐가?”
“두 왕과 신녀 말입니다. 신분제를 없애는 대신 가장 강한 인간들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어요. 영리한 짓거리 아닙니까?”
“‘우리’ 말하는 거야?”
“예. 이매망량을 쫓은 대전쟁의 공신 중 자신들만 남기고 남은 산사들을 모조리 세상의 이물질로 만들다니 실로 대단한 수완이지요.”
레이번의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에 창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없었다. 다시 레이번을 돌아보니 그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 만사에 관심이 없는 듯 굴다가도 갑자기 과격한 생각을 토해내는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결국 그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레이번의 어깨를 툭 쳤다. 레이번은 또다시 모호한 미소를 짓고는 창의 뒤로 가 섰다. 마치 거기가 제 자리라는 양 당연한 투였다.
“그럼 갈까요?”
창은 레이번이 기어코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물어볼 기분은 들지 않았다. 레이번이 부러 천인 운운하며 경비대원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 나름의 씁쓸한—그리고 그의 내력을 안다면 충분히 우스운—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창이 깨닫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만난 지 고작 사흘이 다 되어가는 참이었다.
2.
산 세이어 성국과 달가라 제국 사이의 국경을 이루는 용천에는 달무리라 불리는 자그마한 섬이 있다. 밭을 일구기에도 마땅찮은 땅뙈기와 작은 담천이 그 섬이 가진 전부였지만, 달무리는 알량한 섬의 규모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을 그 작은 몸뚱이 위에 쌓아 올리고 있었다. 달무리에서 벌써 세 대째, 바리신녀의 몸시중을 들 정도로 신력이 충만한 애기바리가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촌동네는 삽시간에 준 성지 수준으로 추앙받았고, 특히 이번 대에 애기바리를 셋이나 낳은 어미는 바리신녀는 물론 성국과 제국의 축하 서한까지 받는 영광을 얻었다. 이미 섬마을 사람들에게서 ‘신모神母’라는 별칭까지 얻은 여인 헤윰 호우리는 지금
“컥…커헉……그르륵….”
저보다 한 자는 더 큰 헌칠한 여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여자는 짐승처럼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사나운 발버둥을 가뿐히 제지하고 여자의 탐스러운 젖무덤 아래에 한 손을 찔러 넣은 헤윰은 가슴어림을 익숙하게 뒤적였다. 이윽고 한 손에 뿌듯이 쥐는 큼지막한 살덩이를 끄집어내자마자 곧장 입으로 가져간 헤윰이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고운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나 죽은 이 만큼이나 괴롭게 홉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마저 막지는 못했다. 뺨을 적신 맑은 물줄기가 피에 닿자마자 자취도 없이 섞여 들었다. 헤윰은 여자의 간을 악착스레 씹어 삼켰다.
“말위 공국의 애기바리께서 보내셨다고요?”
십수 년을 섬마을에서 살아온 촌부답지 않게 헤윰은 우아한 대륙어를 구사했다. ''말위'나 '바리'같은, 귀한 이름들의 기원인 고대어를 옛 발음 그대로 말하는 사교계의 유행 역시 놓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하늘가람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직 덜 영근 꽃봉오리처럼 중간을 봉긋하게 부풀린 치맛자락이 헤윰의 걸음마다 사각거렸다.
섬에서 금저나무 치마라니 대단한 사치로군. 창은 헤윰을 천천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일행의 침묵을 의미했다. 생각에 빠진 창을 대신해 레이번이 대신 대답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그저 인사말 하나를 던지는 것조차 일행의 대표가 되길 꺼렸다. 벌써 며칠째, 여관방을 빌리는 것부터 식사 하나를 주문하는 것까지 모두 창에게 우선권을 넘기는 레이번의 기행奇行—창의 입장에서 그것은 배려도 뭣도 아닌 기행이었다—을 통해 익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잠시나마 잊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창이 뒤늦게 사과했다.
“…아, 잠시 생각을 하느라.”
헤윰은 신모라는 별칭답게 인자한 어머니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느냐 와는 별개로, 고작해야 서른을 겨우 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과 자애로운 모성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시선이 창의 뒤에 선 레이번에게로 향했을 때였다. 부자연스럽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던 미소가 산산이 깨어졌다. 헤윰이 불안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혹, 가장 낮은 왕이 아니십니까?"
항상 서글서글한 미소를 잃지 않던 레이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창은 새파랗게 질린 헤윰의 얼굴을 보고서야 레이번을 돌아보았다. 이제껏 창은 단 한 번도 레이번의 무표정한 얼굴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지만, 만일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물만큼 두려운 광경은 아니었을 터였다. 아주 잠시 동안, 창은 레이번이 헤윰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군요, 헤윰 호우리 신모님.”
언제 그랬냐는 듯 유쾌한 웃음을 만면에 건 레이번이 익살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상냥하게 미소짓는 헤윰의 낯빛이 곧 죽을 사람처럼 백했다. 창은 서서히 혈색을 되찾아가는 그녀의 손등 아래 곱게 접힌 부채의 레이스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레이번의 이름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제까지의 생각을 철회했다. 저 잊혀진 마녀의 연인이라는 갈가마귀 기사의 이름은 레이번의 채도 높은 금발이나 벽안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방금 전 그가 보인 냉막한 무표정에는 놀랍도록 들어맞았다. 누가 지어준 이름일까? 창은 저 말고 또 누가 레이번의 숨겨진 얼굴을 보았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레이번이라고 하는 산사입니다. ‘칼잡이’지요.”
“어머, 제가 실례했네요. "
연신 ‘죄송합니다’와 ‘아닙니다, 뭘요’ 같은 말이 상호 간에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히 오간 다음, 헤윰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 일행의 ‘노잡이’는 창 님이시겠군요?”
창은 떨림이 멎은 부채자락에서 눈을 떼고 헤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만큼이나 보기 드문 검은 눈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분명 호의 어린 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은 동공이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가 꼭 짐승의 그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천박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갑게 웃어 보이고는 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창은 그것이 그녀가 제 시선을 피하기 위한 솜씨 좋은 핑계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헤윰은 분명 레이번을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창을 더 경계하고 있었다. 왜지? 풀리지 않은 채 계속 늘어만 가는 의문이 달갑지 않았다.
“이것이 달무리에서 가없는 탑까지 가는 길이랍니다. 달무리에서 난 애기바리들은 전부 이 길을 지났죠.”
“그리고 이 표시가 애기바리들이 죽은 자리고?”
창은 태연하게 어미 앞에서 그녀의 죽은 딸들을 논했다. 최소한의 애도조차 보이지 않아 어떤 의미에서는 모욕적일 정도였으나 헤윰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네. 이 둘은 제 딸들이 죽은 자리입니다. 순서대로 첫째 도다샤, 둘째 다하샤였죠.”
헤윰이 지도의 가위표들을 짚으며 딸들의 이름을 말했다. 창이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의 가위표마다 이름을 휘갈겼다.
“둘 다 간이 적출된 채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출혈량은 어땠지? 현장을 직접 보고 싶은데.”
“현장은 아마 여러분들께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헤윰은 ‘여러분들께는’이라는 말로 일행의 산사 신분을 에둘러 표현했다. 아무리 덜 된 애기바리라 할지라도 신녀가 머문 자리는 삿된 것들과 어울리는 산사에게 허락되지 않는 법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대신 헤윰은 이미 현장을 다 정리했다는 구실을 댔다.
“조사 명령이 떨어졌는데 혈흔을 지웠다는 소린가?”
“이 곳은 용천입니다. 용이 머무는 곳에 죄 없는 피를 흐르게 둘 수는 없지요.”
“그럼 우릴 부를 필요도 없지 않나? 이미 흐른 피에 제를 지내는 거야 신녀의 일인데.”
헤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미풍에도 바스락대는 금저나무 치마를 입고도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창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 막내딸이 모레 동이 틀 때 뭍으로 갑니다. 이 섬의 마지막 애기바리지요. 그 아이를 위협하는 삿된 것들을 퇴치해주십사 신녀께서 두 분을 이곳까지 청한 겁니다.”
말을 하는 헤윰의 목소리는 먹먹한 슬픔에 잠겨있었다. 뭍이라. 창은 가만히 헤윰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섬이었지. 그는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불현듯 그 실체를 깨달았다. 그때 레이번이 방 안을 채운 침묵을 끊었다. 창은 그가 제가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는 것보다 그것을 한 치의 가감도 없이 말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나보다 더 무신경한 작자가 있을 줄이야.
“신모님, 당신에게서 짐승 냄새가 납니다.”
창은 헤윰이 분에 못 이겨 금저나무 치맛자락을 잡아뜯기 직전에 레이번의 뒷덜미를 낚아챌 수 있었다. 산 사람의 심장도 쪼아 먹는다던 갈가마귀 기사의 위명은 역시 허명이 아니었다고 창은 남몰래 탄식했다. 말 한 마디로 여느 애기바리보다 더 신녀다운 헤윰을 격노하게 하는 것도 흔한 재주는 아닐 터다.
“내가 당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하면 기분이 어때, 레이번?”
“열렬한 사랑고백처럼 들리는데요.”
“그건 너무 기발하고.”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창이 삽시간에 피곤한 얼굴을 했다.
“이봐, 레이번.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남이 싫어할 말을 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정말로 창 님이 할 말은 아니네요.”
레이번이 사심 없이 웃었다. 창 본인조차 차마 부인하지 못할 정곡을 찔려 그는 못마땅하게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만족했다. 한참을 조용히 따라오던 레이번은 창이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거야 해보기 전에는 싫어할 말인지 아닌지 모르니까요.”
창은 금세 그것이 두 시간 전, 야산의 초입에서 제가 물었던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부터 지적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창은 그와 ‘문답의 적절한 시간 간격’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포기하고 레이번의 대답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사실 아예 무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겠으나 적어도 무의미한 실랑이들 중 하나는 피했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차선책인 셈이었다.
“당신이 어린애야? 그 정도는 눈치로 알아야지.”
“사람마다 좋고 싫은 것이 다른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기본 상식이라는 훌륭한 기준은?”
“너무 모호하잖습니까.”
“말을 말자.”
애초에 여자한테 짐승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하고도 욕을 안 먹길 기대하는 녀석에게 뭘 바라겠어. 창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레이번이 늘상 짓고 있는 모호한 미소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픽 코웃음이 터진다. 곁눈으로 그를 보던 창은 내심 무척 놀랐다. 실없이 조소하는 레이번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인간미가 있었다.
3.
죽은 여인의 시체는 생각보다 처참하지 않았다. 간이 빠져나간 자리에 살잽이꽃을 꽂은 다음 양 손을 포개어 배 위에 곱게 얹은 여인은 숫제 경건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종이꽃 한아름을 안고 잠든 것처럼 보이는 사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창이 주위에 둘러진 금줄을 손끝으로 퉁, 튕겼다. 치직 하고 뭔가 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막 비가 내린 강가처럼 물비린내가 자욱하게 깔렸다. 레이번의 시선이 푸르스름한 광택이 나는 창의 손끝에 닿았다. 창은 그 시선을 모르는 척 말을 꺼냈다.
“나는 여기에 남지. 다녀와.”
레이번은 묘한 시선으로 그와 금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창이 각오한 것과 달리 레이번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선선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금줄 안으로 들어간 레이번이 시체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자마자 창은 참을성 없이 어이,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뭔지 알 것 같아? 일단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손톱자국과 멍으로 얼룩덜룩한 목과 구멍이 뻥 뚫린 흉곽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레이번이 턱을 긁적였다.
“거기서 안 보이면 여기서도 안 보이겠죠.”
보인다는 거야, 안 보인다는 거야. 창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레이번의 애매한 화법에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레이번은 그런 창의 표정을 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두 번째로 보는 레이번의 진짜 웃음은 첫 번째보다 더 자연스러웠고 그만큼 더 얄미웠다. 저 자식이. 울컥 눈썹을 찌푸리는 창을 모르는 체하며 레이번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더 수상합니다. 이렇게까지 흔적을 없앨 필요가 있었을까요?”
금줄로 둘러 친 영역은 사람이 아닌 것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금줄에 담긴 신력에 따라 단순히 통행을 막는 것부터 어지간한 망량은 거동도 못하게 하는 제마制魔도구로까지 쓸 수 있는 물건이니 설사 피 냄새를 맡은 잡귀가 있었대도 감히 시체에는 얼씬하지 못 했을 터다. 또, 신녀가 축성했다는 살잽이꽃은 사이한 기를 정화하는 힘이 있다. 설사 삿된 힘에 숨이 끊어졌다 해도 이미 그 육신만큼은 깨끗이 정화되어 흙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이다. 어떤 특이한 기운도 남지 않은 시체에 대해 들은 창은 색다른 추측을 내놓았다.
“어쩌면 사람이 한 짓일지도 모른다. 일부러 금줄이니 살잽이꽃이니 하는 것을 써서 애기바리들에게 어떤 요력이 작용했을 거라고 추측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일단 그 둘을 만질 수 있을 정도의 요력을 가지려면 이 섬의 섬지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저희 같은 산사일 수도 있고요.”
레이번의 말에 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가능하지. 산사가 애기바리를 죽인 거라고 치면 주술력을 숨기려고 흔적을 지우고, 간을 뽑아 망량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도 말이 돼.”
“그럼 지금까지 나온 용의자는 셋이네요. 하나는 금줄과 살잽이꽃의 효용을 알고 또 그것들을 훔쳐낼 수 있는 사람, 둘째는 금줄과 살잽이꽃을 두 번이나 손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망량, 셋째는 산사. 이 중에 제일 폭이 좁은 건 두 번째니 그쪽을 먼저 알아볼까요?”
레이번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는 사이 창은 길 가장자리를 흐르는 작은 시내에 손을 담그고 물길을 헤아렸다. 달무리는 땅덩이에 비해 용천의 기운이 강해 망량이 들기 쉬운 섬이다. 물길이 강한 곳을 따라가면 필히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달무리의 땅신 되는 섬지기가 있을 터다. 창은 해가 지기 전에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말로만 호언장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그의 유능함을 증명해냈다. 처음 와보는 섬의 땅신을 찾아내는 데에 겨우 반나절이 걸렸으니 그만하면 빨라도 보통 빠른 것이 아니다. 허나 그런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대체 어디 있다는 겁니까?”
“여기 어디 있다니까.”
“그러니까 여기 어디요?”
“아 몰라!”
창이 왈칵 짜증을 내자 레이번이 지지 않고 창을 노려보았다. 처음 서너 시간까지만 해도 적당히 인내심을 발휘하던 두 사람은 만면에 답답한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단창까지 꺼내어 풀숲을 요절내다시피 하던 레이번이 창을 땅에 푹 꽂고는 주저앉는다. 더는 못하겠다는 시위에 가깝다. 그래도 명색이 노잡이인데, 괜한 헛고생을 시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창은 힐끔 그의 눈치를 보며 따라 앉았다. 산 속에서 맞는 밤바람은 습하고 차다. 겨우 숨을 골랐다 싶었는데 그새 땀이 마른 목덜미가 선뜩했다. 창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여기 맞다니까. 묻지도 않는 변명은 아무리 작게 말해도 구차하기만 했다. 레이번이 한결 누그러진 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진짜 여기 맞습니까?”
“몇 번이나 말해. 여기 맞다니까.”
긴 한숨. 레이번은 더 따지지 않고 기대 앉은 나무 둥치를 툭 건드렸다.
“반나절 동안 여기만 뒤졌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 하는 말입니다. 하다못해 다람쥐 한 마리라도 나올 법도 한데요.”
레이번의 말을 듣는 순간, 창은 다시금 제가 제대로 물길을 찾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사람의 흔적은 조금도 없는 떡갈나무 숲에 다람쥐가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것부터가 땅신자리라는 증거가 아닌가. 창이 그 생각을 말하자 레이번이 못마땅한 침음성을 흘렸다. 창의 말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고 싶지 않아서였다. 차라리 위치라도 틀렸으면 희망이나 있으련만, 웬만큼 짚이는 곳은 다 둘러봐서 이젠 어디를 봐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렇게 대강 훑어보는 게 아니라 아예 풀숲을 하나하나 헤집어보려면 못해도 사흘은 족히 걸린다. 그가 또다시 한숨을 쉬려 숨을 크게 들이켰을 때였다. 어, 하고 뜻 모를 소리를 지른 창이 튕기듯 달려나갔다. 그를 잡으려다 허공만 움켜쥔 레이번이 뒤늦게 창을 쫓았다.
“창 님, 그러다 넘어집니다! 여긴 절벽도 많다고요!”
주술력만 없으면 멀쩡한 허우대 말고는 봐줄 것 하나 없는 창이 비탈에서 구르기라도 했다간 어디 한 군데가 단단히 망가지고도 남을 터였다. 벌써 저만치 달려간 창의 뒷모습이 위태롭다. 금방이라도 거하게 미끄러질 것 같은 그의 요령 없는 뜀박질에 레이번이 이를 악물었다. 아니나다를까, 돌부리며 나무줄기 따위를 무작스럽게 밟아가며 뛰던 창의 신형이 어느 순간 높이 자란 풀들 사이로 푹 꺼졌다. 레이번이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창 님!”
레이번이 허겁지겁 창이 쓰러진 쪽으로 다가가는 사이 창이 비슬비슬 몸을 일으켰다. 그냥 곱게 엎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죽 미끄러졌는지, 흰 셔츠자락에 흙물과 핏물이 섞여 꼴이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창은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 손을 레이번에게 내밀었다.
“찾았다, 섬지기.”
여느 토끼보다 더 커 보이는 통통한 다람쥐가 창의 손에서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다 ‘섬지기’라는 소리에 추욱 늘어졌다. 그 꼴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레이번의 표정이 기묘하게 어그러졌다. 이게 섬지기라고? 생각과 말이 언제나 일치하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도토리를 독차지하느라 다람쥐들을 다 쫓아냈던 거군요.”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으련만,
“땅신 치고는 치졸하지 않습니까?”
얕은 꾀를 쓰는 것이 도력 높은 영물답지 않게 귀엽다는 뜻이었다.
“내 잠자리를 이렇게 다 망쳐놓고 도움은 무슨 도움?”
섬 하나의 지기地氣를 다스리는 다람쥐신이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속이 있는 대로 틀어진 영물에게 레이번이 기름을 끼얹었다.
“도토리 드릴까요?”
“네놈이 안 줘도 도토리 많다! 누구 말대로 나 혼자 다 먹으니 아주 넘친다 왜!”
성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알량한 뇌물 공세에 다람쥐신이 소리를 빽 질렀다. 창은 뒷골이 당겨오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목덜미를 주물렀다. 이젠 나도 몰라. 그는 다람쥐신을 설득하는 것과 레이번의 협조를 구하는 것, 양쪽 모두를 포기하고 구석으로 가 앉았다. 둘이서 어떻게든 하겠지.
그로부터 삼십 분쯤 뒤, 창은 반쯤 자포자기로 내버려둔 레이번이 다람쥐신을 설득해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예 그들을 쳐다 보지 않겠다며 펄쩍펄쩍 뛰던 다람쥐신이 한결 누그러진 투로 탐스러운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창은 의심스런 눈으로 레이번을 쳐다보았다.
“금줄? 그건 나도 못 만져. 달무리엔 그거 만질만한 놈은 없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람쥐신이 딱 잘라 말했다.
“의외로…아니 생각만큼 무능하군.”
창의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받은 다람쥐신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놈들! 지금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서 다람쥐신은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달무리 신당에서 쓰는 금줄은 그냥 금줄이 아니란 말이다! 오단 리 연합에 있는 본당에서 직접 보낸 귀물貴物이다. 그런 것을 함부로 만지고도 무사할 힘이 있었담 내가 겨우 네 녀석 따위에게 잡혔을 것 같으냐?”
다람쥐신이 앞발가락 하나를 꼿꼿이 세우고 창을 가리켰다. 다람쥐의 삿대질이 좀처럼 두렵지 않았던 창이 입으로만 예에 죄송합니다, 하고 건성으로 사과했다. 다람쥐신이 씩씩거리며 도토리 하나를 갉작이기 시작했다. 작은 섬의 땅신은 화를 내는 것도 빠르고 식는 것도 빨랐다. 창은 다람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주었다. 버럭 화를 내려던 다람쥐신이 레이번을 힐끔 보더니 팽 콧방귀를 뀌고는 도로 도토리로 관심을 돌렸다. 창은 슬슬 레이번이 다람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혹시 달무리에 사람 간 빼먹는 요마도 있습니까?”
레이번이 묻자 다람쥐신이 도토리를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둥그런 눈동자가 영물 특유의 세월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빤히 들여다본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이쪽으로 한번, 저쪽으로 한번 갸웃거리며 레이번의 얼굴을 뜯어본 다람쥐신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아주 모르지도 않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는 척 하는 거냐?”
“설마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네놈이 살면서 구미호 얘기 한 번을 못 들었다고?”
별것 아닌 물음치고 다람쥐신의 어조가 꽤나 의미심장했다. 레이번은 대답하거나 그 의미를 캐묻는 대신 사람 좋은 낯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창은 그가 비밀을 비밀이 아닌 것처럼 꾸미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4.
“구미호는 대전쟁 이후로 다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이젠 드물 텐데요.”
“구미호가 뭔데?”
“…거 보십시오.”
레이번은 ‘봤죠?’ 하는 표정이었다. 창은 실로 오랜만에 멍청해진 기분을 느꼈다. 다람쥐신이 혀를 쯧, 차더니—창의 입장에서는 꽤 진귀한 장면이었다— 선심쓰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미호는 간을 먹고 사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다. 동물 간도 먹긴 한다고 들었지만 보통은 사람 간을 먹지.”
“왜지?”
“그것들 식성이야 내 알 바가 아니다만, 소문으로는 사람 간 백 개를 먹으면 사람으로 변한다더라. 젊은 미녀로 변해서 먹잇감을 꼬드긴다고 들었다.”
“미녀로 변할 줄 아는데 사람이 되고 싶어할 이유가 있나?”
레이번이 미리 준비한 것처럼 즉답했다.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닌데.”
창 역시 당연하게 반박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레이번이 그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저…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새벽부터 객당에 찾아온 소녀는 헤윰 호우리의 막내딸이자 현재 살아남은 달무리의 유일한 애기바리 나라샤였다. 신당에 몸을 담은 이답게 이색異色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흰 드레스 끄트머리에 풀물이 조금 배어 있었다. 밤을 틈타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사람이 다니는 길을 피해 올 정도로 몸을 사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범인을 찾아낸 건가?”
“맞아요.”
“누구지?”
나라샤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최대한 비정한 목소리를 냈다.
“저희 어머니요.”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었던 탓이다.
나라샤는 나이 터울이 많은 장녀 도다샤보다는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 다하샤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가족 중에 마음을 터놓을 이가 그녀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딸에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헤윰 호우리는 나라샤에게 항상 다가가기 어려운 어른이자 존경하는 신모였고, 도다샤는 헤윰을 그대로 빼닮은 애기바리의 모범이었다. 걸음마저 허투루 딛는 법이 없는 두 모녀를 보며, 어린 다하샤와 나라샤는 그네들과 절대로 같아질 수 없는 자신들의 모자람을 매일같이 깨달았다. 그러니 서로에게만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나이가 차면서 그것은 곧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그 비밀들 중의 하나가 바로 다하샤와 나라샤의 종이꽃 편지였다.
애기바리가 만드는 살잽이꽃은 하루아침에 그 모양을 다듬기에는 퍽 복잡하다. 다하샤와 나라샤는 어려서부터 지루한 꽃접기를 반복하다 그 안에 작은 글귀를 적어 숨겨두는 놀이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일종의 점복과도 비슷한 것으로, 매일 접어내는 살잽이꽃 안에 적힌 말을 그 날은 꼭 지키고야 마는 둘만의 약속이었다. 나라샤가 십 년을 거듭한 소중한 추억과 함께 꺼내 보인 것은 바로 그 살잽이꽃이었다. 다하샤의 뻥 뚫린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전부 마셨던 꽃들과는 달리 손수 염색한 오색지가 알록달록했다.
“언니가 발견된 날 아침, 제 방에 있던 꽃들이에요.”
이걸 어쩌라고? 창이 눈으로 묻자 나라샤가 꽃들 중 가장 크고 고운 것을 집어다 창의 손에 올려주었다. 꽃 하나를 다 펼치기도 전에 창은 훅 끼치는 피 냄새를 맡았다. 혈서로 쓴 문구는 짧았다. [언니 죽은 날 엄마 손톱 봉선화물]
창은 읽은 종이를 레이번에게 넘겼고 나라샤는 다음 꽃을 집어주었다. 먼젓번 꽃보다는 작고 군데군데 구겨진 데가 보였다. [오늘 엄마 손톱 백예옥] 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글귀였다. 하지만 레이번은 뭔가 깨달은 듯 창의 어깨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다 말고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라샤가 마지막으로 건넨 꽃은 실패작이었다. 누가 보아도 못나고 군데군데 세게 당겨 찢어진 부분까지 있는 못난이 꽃은 접었다기보다 손으로 움켜 구긴 쪽에 가까워서 펼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마지막 꽃은 먼젓번 꽃들에 비해 훨씬 명확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 죽으면 도망쳐]
“백예옥을 갈아 손톱에 바르면 적어도 한두 달은 흰 물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다하샤 호우리 님이 돌아가신 건 지난 주였고요.”
레이번이 창에게 설명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창은 레이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천천히 이해했지만 레이번은 그런 창을 기다려주었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광경에 레이번을 돌아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왔다.
“헤윰 호우리의 손톱에, 백예옥 물이 들어 있던가요?”
창은 그녀의 손을 본 적이 있다. 겁에 질려 핏기가 사라진 헤윰 호우리의 손등 아래, 우아한 부채를 그러쥔 손가락 끝으로 기억의 중심이 서서히 옮겨갔다. 헤윰 호우리의 손톱은 깨끗한 분홍색이었다. 창의 아연한 시선을 마주한 나라샤가 울음을 터뜨렸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확인하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두 남자 중 누구도 우는 소녀를 달랠만한 주변머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나라샤는 오히려 혼자만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고 금세 자신을 추슬렀다.
“지난 달 초에 엄마는 우리랑 같이 손톱에 봉선화물을 들였어요.”
나라샤가 아직 주홍빛이 선명한 손톱을 내보였다. 엄마는 성한 꽃을 따기가 아깝다고 새끼손톱에만 했지만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한참 먼 옛날을 그리듯 아득했다. 창은 꽃잎마냥 작고 불그레한 손톱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손톱에서 봉선화물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지? 며칠도 안 된 백예옥 물을 감쪽같이 지우는 방법은? 설사 헤윰 호우리가 범인이라고 해도, 손톱을 하루아침에 깨끗한 ‘새 것’으로 만들어내는 재주는 없어. 창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한 육신을 되돌리는 주술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이매와 망량만이 제 육을 영으로 채워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면.
“신당 안에는 금줄이 쳐져 있다고 했나?”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것은 나라샤가 아닌 레이번이었다. 그는 나라샤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헤윰 호우리는 사람입니다. 그건 저보다 창 님이 저 잘 아실 텐데요?”
그건 그렇지. 창은 수긍했다. 그의 눈에 비친 헤윰 호우리는 분명 사람이었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의심스럽다고 해도. 그렇다면 어째서 헤윰 호우리가 제 딸들을 죽였을까. 설사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 해도, 창은 헤윰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만 이 복잡한 비극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았다. 글쎄, 그게 될까요. 레이번은 창의 막연한 생각에 동의했으나 동시에 회의적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낼 생각이십니까?”
“어머, 손님들이 계셨네요.”
나라샤가 소스라치며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것을, 창이 팔을 잡아내려 간신히 막았다. 원체 표정변화가 적은 얼굴이 고마웠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등 뒤에서 들려온 어미의 목소리에 새파랗게 질린 나라샤처럼 비밀을 품은 얼굴로 헤윰을 맞이해야 했으리라.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수인사를 하면서도 창은 등줄기가 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인기척도 없이 문을 열었던 헤윰은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금저나무 치마가 사각거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다.
‘당했다.’
창이 입 안으로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드릴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헤윰은 마냥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 품 속에 있던 꾸러미를 풀었다. 구렁이처럼 흘러나오는 한 타래의 금줄을 보자마자 창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리며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본능적인 경계를 무마한 것은 창의 초인적인 인내심이 아니라 레이번의 검이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창의 눈에 보이도록 검병을 움켜쥐고 있었다. 창은 레이번이 헤윰의 시선에 포착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하려는 바를 알아챘다.
‘제 길을 보여주는 한, 당신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레이번은 그렇게 말하며 싫다는 창에게 구태여 제 검을 쥐어줬었다. 진검은커녕 목검 한 자루도 제대로 들고 휘둘러본 적 없는 창이 질색을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당신을 지킬 검입니다. 한 번은 잡아 봐야죠. 창은 끝내 레이번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고 생전가야 볼 일이 없을 것 같던 검날을 찬찬히 훑어보기까지 했다.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노장老將처럼, 세월을 켜켜이 이고도 풍화되지 않은 시퍼런 날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연한 그 예기가 지금, 창의 눈앞에 있다. 그래, ‘칼잡이’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창은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침착을 가장했다.
“엄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라샤가 물었다. 헤윰은 금줄에 쓸린 손바닥이 발갛게 부푸는 것도 개의치 않고 힘주어 줄을 묶었다. 한구석에 단단히 고정된 금줄 끄트머리를 들고 몇 발짝 걸음을 옮긴 그녀는 재차 금줄을 방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방마다 금줄을 치는 중이란다. 네가 달무리를 나가기 전까지는 매일 이렇게 할 거야. 그때까진 인부들도 전부 신당 큰방에서 재울 거니까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해두렴.”
헤윰의 치맛자락이 사각대는 소리와 빳빳한 새 금줄이 단단히 묶이며 우그러지는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죽음 같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창이 손에 배어난 땀을 허벅지에 닦아냈다. 아니, 침묵이 아니라 다가올 일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쪽에 가까웠다. 이제 남은 매듭은 하나뿐이었다. 문가로 다가간 헤윰이 처음 남겨뒀던 금줄의 끝자락과 마지막 매듭에서 딸려온 금줄을 모아 잡았다. 창이 이를 악물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참으면 될 터였다. 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엄습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안 죽으면 됐지. 창은 마치 화난 사람처럼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레이번의 손아귀 위로 힘줄이 솟았다. 등 뒤에서 팽팽하게 달아오르는 둘의 시선을 모르는 양, 헤윰은 금줄을 매듭지었다.
5.
창은 물어 물어 도다샤가 죽은 곳을 찾았다. 애기바리가 피를 흘린 자리마다 그녀의 영을 지키는 지킴돌과 소박한 애도가 담긴 종이꽃들이 놓여 있었다. 나라샤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둘째 다하샤가 죽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은 시신이 있던 자리 근처에서 어떤 주술적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창이 손끝으로 툭 건드리자 허울 좋은 지킴돌이 옆으로 밀려난다. 말이 ‘지킴돌’이지, 수호진은 고사하고 간단한 파마주술 하나 걸리지 않은 그냥 돌멩이라는 뜻이다. 이상한 일이야. 창이 재차 곱씹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첫째 딸이 죽은 자리는 이렇게 허술하게 해놓고, 둘째 딸이 죽은 곳에는 손수 금줄까지 쳤다? 뭔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창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구색만 맞춘 지킴돌을 넘어 시체가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만일 구미호 같은 망량이 도다샤의 죽음에 관여했다면 그 힘은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그 정체가 무엇이든 창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창은 그만한 ‘노잡이’였으니까. 그렇지만 현장은 깨끗했다. 수풀 구석구석을 발로 헤쳐가며 살폈으나 그곳에 창이 찾는 것은 없었다. 여기가 아냐. 창은 그렇게 허탕만 치고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라샤가 떠나기로 한 초하루 새벽까지는 만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단서가 전혀 없다는 창의 말에도 레이번은 실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았다는 쪽에 가까웠지만. 부질없이 시간을 날렸다며 저기압인 창 앞에서 저까지 거들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그는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제법 관대한 편이기도 했다. 시간 낭비 좀 했으면 어떻습니까. 아직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늦은 것도 아닌데. 그는 창이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소득이라는, 긍정적이다 못해 낙천적인 주장까지 했다. 그러자 이 세상의 마지막 낙천주의자가 되느니 첫 번째로 죽는 비관주의자가 되길 택할 창이 반쯤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내 칼잡이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라고 해석해도 좋을 얼굴이었다. 레이번이 쓰게 웃었다.
“그렇게 질색할 줄은 몰랐는데요…….”
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공통점은 양쪽 다 망량이나 주술력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점 아닙니까. 그건 현장을 그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건 다하샤를 죽이고 금줄을 쳐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혀 새로운 게 아냐.”
그건 그렇지만요. 레이번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시겠지. 레이번은 상황이 급박하지 않은 한 시간의 힘을 믿는 축에 속했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한동안 뚱한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던 창은 한참 뒤에야 아,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
레이번이 눈만 굴려 창을 곁눈질했다. 창이 답답하다는 듯 부연했다.
“제마도구를 써서 흔적을 지운 게 아니라,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고.”
레이번의 눈이 동그래진다. 처음 보는 그의 놀란 얼굴에 창은 약간 즐거워졌다. 급기야 레이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창은 다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놀랍지? 뭘 놓치고 있는지 생각했더니 그거였어.”
“아뇨, 그게 아니라….”
“뭐가?”
“흔적을 지운 것과 ‘원래부터 아무 일도 없던’ 것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건…, 물을 흘리고 닦아낸 바닥이랑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흘리고 안 닦은 바닥의 차이 같은 거다. 전자는 과도하게 깨끗해서 표가 나.”
레이번은 새삼 감탄했으나 입 밖으로 내어 칭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창은 레이번의 반응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니 섭섭할 리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알아낸 사실에 골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다샤는 순수한 인력으로 깨끗하게 죽였고, 다하샤를 죽일 때는 주술이든 망량이든 뭔가가 개입됐기 때문에 흔적을 지웠다. 왜 똑같이 죽이지 않은 걸까. 분명히 신력 면에서는 도다샤가 다하샤보다 월등했다고 들었으니 다하샤를 죽일 능력이 모자라서 다른 힘을 끌어들인 것도 아니었을 터다. 소파에 몸을 깊게 묻는 창의 시야에 어제 나라샤가 두고 간 다하샤의 살잽이꽃이 들어왔다. 어린 동생을 위해 피로 적은 혈서. 저거다. 창은 자매의 죽음이 왜 다른 양상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다하샤는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과 연관이 있으리라 창은 추측했다. 하지만 추측일 뿐이었으며, 그것이 마지막 의문도 아니었다. 창이 방에 빙 둘러 쳐진 금줄을 달갑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줄은 가짜였다. 아무런 신력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새끼줄에 불과했다. 만에 하나라도 헤윰 호우리가 그를 모르고 사용했을 리도 없었다. 달무리 신당에서는 오단 리 연합의 본당에서 직접 보낸 금줄을 사용한다고 했으니까. 가짜 금줄, 혈서, 다하샤의 시체를 둘러싼 진짜 금줄, 도다샤가 죽은 곳을 지키는 가짜 지킴돌, 그리고 헤윰 호우리의 손톱. 창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빠르게 교차되며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답을 가리켰다. 알 것 같은데. 알 것도 같은데. 창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해답에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이것부터 말하지.”
레이번이 창과 눈을 마주친다. 창은 잇새로 짓씹듯 내뱉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럼 망량입니까?”
“되다 만 반쪽짜리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서 신녀가 직접 축신祝神한 금줄은 통과할 수 없어.”
레이번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지난밤의 일에 대해서조차 일언반구도 않던 창이 여기까지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창은 레이번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래서 다하샤를 죽인 건 헤윰 호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금줄이 쳐져 있었으니까요?”
“그 금줄이 진짜였으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말이다. 창이 방 가장자리의 금줄을 가리켰다.
“저건 가짜였어. 그래서 어젯밤에 내가 멀쩡했던 거다.”
“계속하세요.”
“우리가 있는 객당은 물론이고 신당에서 사람이 머무는 방에 전부 쓰고도 남을 정도로 가짜 금줄이 많아. 그런데도 다하샤를 죽일 때는 진짜 금줄을 썼지. 본당의 봉인을 뜯지 않고는 꺼낼 수도 없는 걸. 그렇다는 건 헤윰 호우리가 다하샤를 죽인 망량, 혹은 산사의 흔적을 없애줬다는 뜻이거나—”
“—망량 자체를 없앴다는 뜻이겠군요.”
창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다하샤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금줄을 봤을 때, 그 금줄이 다하샤를 죽인 망량을 퇴치하기 위해 제삼자가 친 건 아닐까 생각했었지.”
“과거형이네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창이 재차 방에 있던 금줄을 눈짓하자 레이번이 알겠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정말 나라샤를 보호할 생각이면 진짜 금줄을 쳤겠군요.”
“응. 아까 나라샤의 방에 가봤는데, 역시 가짜더군.”
“헤윰 호우리가 다하샤를 죽인 망량을 소멸시켰기 때문에 진짜 금줄을 칠 필요가 없어진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네 말대로라면 헤윰 호우리와 그 망량이 애기바리의 간을 노리는 경쟁자 관계였을 수도 있어.”
“요컨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요.”
“응. 아는 게 없으니까.”
레이번이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해서 좋군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이번은 창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묻지도 않았고,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백 년이 지나 이제 전설로 남은 첫 산사의 칼잡이처럼, 레이번은 오로지 노잡이의 길을 따르는 것에만 충실했다. 그런 레이번의 시대착오적인 맹목이 창은 무척이나 거북스러웠다. 하지만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다.
창은 이 밤이 지나기 전 나라샤를 헤윰 호우리에게서 떼어놓기로 결정했다.
6.
나라샤는 해가 떨어지자마자 들이닥친 창과 레이번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언니가 도망치라고 했으니까요.”
어떤 결론이 나오든 다하샤의 유지遺志를 따르리라 결심한 열일곱의 소녀는 금방이라도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다. 미리 챙겨둔 단출한 짐을 품에 안고 동그마니 선 나라샤의 어깨가 검은 원피스 안에서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평생 흰 옷만 입었던 그녀에게 검은 옷은 그만치 무거운 상복이었다.
“나라샤 님, 당신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나라샤를 데리고 신당을 빠져나가는 것은 밤이 깊어진 다음의 일이다. 레이번과 창은 그 전까지 그녀를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모를 습격자로부터 지켜야만 했다. 그들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자정이 다 된 시각이라 그런지 헤윰 호우리의 눈가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그러나 정작 창의 눈에는 꾸며낸 인간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창은 제가 보는 가식이 정체를 모르는 헤윰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착각인지, 아니면 그가 보는 수많은 세상의 진실 중 하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에, 레이번을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나?”
헤윰 호우리가 찻잔을 들어올렸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창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환영하는 쪽이었다.
“제가 모자라서 한 실수였답니다. 이렇게 또 말씀하시니 새삼 부끄럽네요.”
지난날의 과오를 덮으라는 의미를 완곡하게 돌려 말한 헤윰이 또다시 차를 홀짝인다. 창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헤윰이 그를 바라보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초조한 마음을 능숙하게 감추고 시선을 들었을 때에야 창은 찻잔을 들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답은 천천히 들어도 좋다. 어차피 레이번이 그의 곁에 있는 한, 언젠가 창은 그의 비밀을 알게 될 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헤윰 호우리의 속내를 파고들어 흔드는 것이었다. 레이번은 창이 그를 화제로 끄집어낼 줄은 몰랐겠지만, 어쨌든 그에게 헤윰의 몸과 정신을 붙들어놓겠다고 호언장담한 이상 창은 제 역할에 충실할 참이었다.
“‘가장 낮은 왕’이라고 했던 걸로 안다.”
헤윰이 재빠르게 창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주의 깊은 시선이었다.
“섬지기를 만났어. ‘가장 낮은 왕’이라면 모를 리 없는 요마에 대해 얘기해주더군.”
“땅신님을… 만나셨다고요?”
“들어봐. 당신도 흥미가 있을 이야기니까.”
창은 반쯤 식은 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가 아는 것은 없었지만, 갖고 있는 실마리들은 제법 되었다. 답이 헤윰에게 있다면 그녀에게서 답을 이끌어내면 된다. 창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히 의미심장한 어조를 꾸며낼 약간의 연기력뿐이었다.
“사람의 간을 먹는 여우인데, 백 년도 전에 사라졌다고 했다. 이래도 아는 게 없나?”
“저는 어제의 일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창은 순순히 물러서는 척 양손을 가볍게 내보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여유롭다 못해 고압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헤윰을 빤히 보던 그가 물었다.
“손톱에 봉선화물을 들였다고 하던데.”
헤윰은 잠자코 찻잔을 매만졌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타래에 가려진 뺨에 턱 근육이 불룩하게 솟는다. 이를 악문 태가 역력한데도 헤윰의 미간에는 주름 하나 없다. 다소곳이 내리깐 시선 안쪽으로 기광이 언뜻 스친다. 창은 사람이 아닌 망량의 본능으로 위협을 느꼈고 그 와중에 또다시 확신했다. 헤윰은 사람이었다. 부조리한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 채 헤윰을 쏘아보던 창은 이제 그녀를 노골적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적의가 섞였다. 다분히 고의적인 변화였다.
“나라샤가 그러더군. 네 모녀가 다 같이 모여서 했다고.”
“하고 싶으신 말이 뭔가요?”
“이상하지 않나? 같이 물들인 봉선화물이, 나라샤의 손톱에는 멀쩡히 있고, 네 손톱에는 없는—”
그 때였다.
창은 불현듯 뇌리에 꽂히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말을 멈추었다. 여지껏 미리 계획했던 대로만 움직이던 그가 완전히 방향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맙소사. 헤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의 어깨를 짚었다. 가녀린 여성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우악스럽게 창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춘 헤윰이 바쁘게 창을 다그쳤다.
“말 해요. 뭐죠? 뭘 알아차린 거예요?”
불안을 넘어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을, 창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가만히 보기만 했다. 믿을 수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어느새 버석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떼는 것이 힘겨웠다. 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너는 사람이었어…….”
헤윰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비통하게 흐느끼는 그녀를 창은 비난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죽은 다하샤의 손톱에는 봉선화물이 없었다.
7.
창이 헤윰을 방문하는 사이 레이번은 나라샤와 함께 신당을 빠져나왔다. 섬 끝의 작은 나루터로 가는 외길은 잘 닦인 자갈길이었으나 작은 불씨조차 없는 어둠에서는 험한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은 나라샤에게만 국한된 일로, 레이번은 달빛에만 의지해 걷는 사람답지 않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라샤는 돌부리에 계속 채이는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들고 있던 짐을 그러안았다. 어미가 준 모든 것을 두고 나온 그녀에게 완전히 제 것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당장 몸에 걸칠 옷가지 한두 벌과 애기바리임을 증명하는 신패, 그리고 다하샤의 꽃, 꽃들. 그것이 나라샤가 가진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외에도 한 가지 짐을 더 들고 있었다. 봉인부가 붙은 작은 나무상자는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럼에도 나라샤는 들어주겠다는 레이번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 것이 아닌 신물을 훔쳐냈으니 이 정도의 괴로움쯤이야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는 기특한 책임감이었다. 신녀를 숭앙하지 않는 산사의 눈에 나라샤의 경건한 태도는 참 같잖아 보였으나 레이번은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뒤면 헤어질, 그것도 한참이나 어린 계집아이와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 왔습니다. 준비하세요.”
휘익. 레이번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나룻배 한 척이 용천 하류의 덤불숲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빼빼 마른 노사공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나라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과례過禮에 당황하여 마주 고개를 숙이려는 나라샤의 목덜미를 레이번이 잡아 세웠다. 애기바리에게 하는 절은 신녀에게 하는 절이지, 애기바리에게 하는 절이 아니다. 레이번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서야 나라샤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다른 애기바리들에게는 일상에 가까운 일조차 어색해하는 그녀를 보며 레이번은 그녀가 신모와 언니들의 그늘에 가려져 얼마나 제 취급을 받지 못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얼마나 걸립니까?”
“금방 끝나요.”
레이번은 나라샤가 한 번도 금줄을 쳐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창이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나라샤가 달무리를 탈출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나라샤가 나룻배에 엉성하게 설치한 제대에 금줄을 치는 사이, 뱃사공은 나무둥치에 묶어뒀던 사슬을 감아들이기 시작했다. 레이번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누가 나타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우우우, 하는 긴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었다. 상처 입은 짐승의 소리였다. 레이번이 검을 빼들고 다 녹슨 쇠사슬을 내리쳤다. 금속이 깨어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부서진 쪽은 쇠사슬이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라샤와 달리 상황을 빨리 파악한 노인이 허겁지겁 배를 뭍에서 밀어냈다.
—나라샤, 나라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혼을 태워 울리는 완연한 망량의 부르짖음에 나라샤가 숨도 못 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가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용천의 흐름에 올라타는 사이에도 나라샤를 부르는 목소리는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져 왔다. 사방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만으로 방향을 정확히 잡아낸 레이번이 외길에서 옆으로 벗어난 풀숲 한가운데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그의 눈에 보이던 목소리의 정체가 물살을 타기 시작한 배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인영의 새하얀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그 와중에도 점차 형체를 갖추던 목소리는 어느새 사람의 육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라샤, 아가.”
헤윰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나라샤는 막 금줄을 다 묶고 제대에 앉으려다 말고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나루터에 선 헤윰이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성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나라샤는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차디찬 용천을 거슬러 어미가 있는 뭍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나라샤는 제가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몰랐다. 눈물이 고일 새도 없이 툭툭 떨어져 검은 옷깃을 적셨다. 헤윰의 치맛자락에도 젖은 얼룩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엄마도 울었어. 엄마한테도 내가 필요했던 거야. 엄마는, 엄마도 나를. 나라샤가 사공의 걱정스런 시선을 뒤로 하고 뱃전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보았다. 헤윰의 옷에 생긴 얼룩은 눈물보다 붉고, 크고, 거친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피가 튄 자국이었다. 나라샤는 순간 제가 정수리부터 용천에 처박힌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만큼 시리고 아픈 현실에 머리가 아찔했다. 나라샤의 떨리는 눈동자가 헤윰의 처연한 눈물을 따라 뺨으로, 턱으로, 목으로, 그리고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내려갔다. 금속성의 비정한 빛이 도는 손톱이 한 치나 자라있었다. 저 손으로 언니를 죽였다. 저 손으로 가슴을 가르고 간을 파냈어. 저 손으로 이젠 나를 죽일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그랬기에 아무도 막지 못했다.
나라샤가 몸을 돌려 제대 위로 뛰어올랐다. 금줄로 빈틈없이 에워싼 제대에 드는 것만이 유일하게 제 목숨을 살릴 길이었기에 그녀는 절박했고, 필사적이었다. 때문에 헤윰이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것도 나라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돼—!!”
나라샤가 제대 위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겁먹은 아이마냥 제 몸뚱이를 잔뜩 옹송그린 소녀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쉬려고 했다. 작고 여린 숨결 대신,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무시무시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하는 어린 여성 특유의 고성이 아니었다. 지저地底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야성과 한계에 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맹수의 울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린 몸을 감쌌던 치마 아래로 털이 수북한 길짐승의 꼬리가 몇 개씩 비어져 나오고 손톱 역시 곡옥처럼 매섭게 휘어 자라났다. 언제나 자신 없고 수줍어 보이던 순한 눈매는 여전했으나 그 안의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동공이 길게 찢어져 피눈물을 줄줄 흘리는 나라샤의 모습을 본 헤윰이 앞뒤 가리지 않고 용천으로 뛰어들었다. 반쯤 헤엄치다시피 배로 다가가자 사공이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노를 휘둘러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한 손으로 노를 움켜쥔 헤윰이 사공을 잡아당기며 그 힘을 이용해 배 위로 올라탔다. 차가운 새벽 강에 빠진 노인은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다. 그가 공경해 마지않던 애기바리가 한낱 삿된 이매망량으로 변하는 순간, 강둑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칼잡이가 등을 돌려 어딘가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를 도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레이번은 헤윰이 점점이 남긴 피 냄새를 따라 달렸다. 나루터에서 훌쩍 떨어진 곳에 다다랐을 때쯤 나라샤의 비명이 겨우 멎었다.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했으나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창의 안위였다. 신당 뒤켠에서 레이번은 피가 흥건하게 고인 웅덩이를 보았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구겨지듯 주저앉아 있는 창을 발견했다.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몰라도, 창은 머리 끝부터 피를 뒤집어쓴 사람마냥 얼굴부터 가슴팍까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창 님! 괜찮으십니까?”
창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부둥켜안듯 부축하던 레이번은 그의 상반신 전체를 적신 피에서 이질적인 냄새를 맡았다. 창에게서 문득문득 맡곤 했던 서늘한 물내음이 아닌 길짐승의 냄새다.
“이건…?”
“내 피 아니야. 난 다친 데 없어.”
레이번은 창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셔츠자락을 확 열어젖혔다. 그의 말대로 상처는 없었다. 끈적하게 피가 배어나는 옷깃을 코에 가져가자 역시나, 방금 전에도 맡았던 헤윰의 냄새가 났다. 창이 기운 없이 레이번을 밀어냈다.
“죄 없는 피야. 너도 괜히 부정타지 말고 손 치워.”
“저는 괜찮습니다.”
레이번이 창을 일으켰다. 피가 옮겨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창을 옮겨다 물가로 데려가던 그가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죄 없는 피라는 건—”
“—헤윰 호우리 맞아. 곧 죽어서 죄값 치를 여자라 그런가 봐.”
죄 없는 피는 보통 어린아이나 동물처럼 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순수한 생명을 죽여 받은 피로, 산사에게 소위 ‘원한 없는 저주’를 내리는 선한 제물의 상징이다. 하지만 선악의 인과에 얽힌 성인의 피도 죄 없는 피가 될 수 있었는데, 주술력을 가진 산사가 혼을 태워 죄의 업을 씻기를 불사했을 때 스스로 내어 흘리는 피가 그것이었다. 헤윰 호우리가 제 몸뚱이를 모질게 찢어 피를 흩뿌리는 순간 창은 그녀의 피가 죄 없는 피라는 것을 눈치챘었다. 피하자면 못 피할 것도 아니었지만 창은 미동도 않고 서서 헤윰의 피를 온전히 다 맞았다. 천 년을 산 여우의 목숨값이 방울방울 맺혀 창의 전신을 짓눌렀다. 창이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순간, 헤윰은 회한 어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고맙다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싸구려 동정이었는지 알량한 죄책감이었는지는 몰라도 창은 그녀의 저주를 받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레이번이 창의 몸에서 헤윰의 피를 씻어내는 사이 창이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다하샤 호우리가 구미호였어. 헤윰 호우리는 사람이었고. 사람 간 백 개를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지? 헤윰 호우리는 사람이었지만, 그 딸은 사람이 아니었어….”
사람이 되고 싶어 간을 백 개나 먹은 여자는 결국 사람이 되었다. 남편을 맞이해 아이를 낳고 사람의 삶을 살았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야만 했다. 여자는 제가 비극을 끝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헤윰 호우리가 네게 물어보라더군. 백 년 전에 구미호가 사라진 이유를 아냐고.”
백 년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레이번은 말을 아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팔과 가슴팍에 머물던 손이 얼굴로 올라오자 창이 눈을 감았다. 진실을 꿰뚫는 눈이 눈꺼풀 뒤로 모습을 감춘 뒤에야 레이번은 솔직해질 수 있었다.
“여우사냥꾼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전혀.”
그럴 만도 하지요. 레이번이 고소苦笑했다. 이제는 그의 기억에서도 흐릿한 옛이야기였다.
“구미호들을 죽이고 다니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산사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데, 구미호가 나타났다는 곳에 가보면 꼭 간을 파 먹힌 여자 시체만 있었죠. 그렇게 죽은 여자가 두 자리를 넘어갈 때쯤 죽은 여자들이 구미호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한 십수 년이 지나고 났더니, 그 여자들을 죽이는 누군가에게 언제부터인가 ‘여우사냥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더군요.”
동족을 죽인 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각별하리라. 레이번은 자신이 수없이 베어 넘긴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헤윰은 다를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이 고작 동족들을 죽인 죄를 고하는 것일 리가 없었다.
8.
“엄마, 엄마…….”
넋없이 부르는 소리에 따라오는 대답은 없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입 안으로 들어가도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입 안에 끈적하게 고인 피가 한 마디를 뗄 떼마다 질척하게 혀 끝에 들러붙는다. 나라샤는 침인지, 피인지, 눈물인지, 혹은 그 전부인지 모를 액체를 꿀꺽 삼켰다. 역한 피 냄새가 비강을 가득 채우는 것과 동시에 터지려던 설움이 도로 가슴 속 깊이 내려앉는다. 나는 울 자격도 없어.
—내가 죽였으니까.
먼저 죽어간 두 딸들처럼 헤윰 호우리의 가슴에는 휑한 구멍이 났다. 쉼 없이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신녀의 옷깃을 물들인 지 오래, 온기를 잃은 그녀의 사체에서 신모의 정결함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가, 괜찮다.’
나라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리고 헤윰의 흉곽을 꿰뚫은 제 손톱을 보았을 때 헤윰은 그렇게 딸을 달랬다. 너는 괜찮다. 너는 괜찮아. 폐병 환자처럼 그렁그렁한 숨을 몰아쉬면서도 헤윰은 끈질기게 나라샤를 설득했다. 너는 괜찮다. 네가 나쁜 게 아냐. 아무 걱정 하지 마. 그러니까.
‘어서 먹으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손길로 헤윰은 나라샤의 머리를 끌어다 피가 치솟는 가슴에 가져갔다. 내 간을 먹어. 그래야 네가 산다. 나라샤는 스스로의 추악함에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상상했지만 그녀의 입에는 침이 고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괴물이었다. 싫다, 못 한다 울고 소리치면서도 탐욕스레 움켜쥔 간을 놓지 않았던 것이 누구였던가. 나라샤는 자신을 혐오하며 헤윰의 강권을 받아들였다. 어미의 내장을 이로 끊고 게걸스럽게 삼키는 짐승에게 헤윰은 후련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제 되었다. 이제 다 되었다. 헤윰이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의 간을 백 개를 먹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구미호들의 숙원은 헤윰의 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하나의 단서가 더 붙어있었다.
<사람이 될 수 있는 구미호는 단 한 명뿐이다>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간 죽인 구미호가 몇이던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 동안 헤윰은 발 디딘 자의 왕을 만났던 옛 기억을 떠올렸다. 훗날 망량을 몰아내고 성왕으로 불릴 사내는 헤윰을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찼었다. 너 그렇게 피를 묻히고 사람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왕이 노하여 물었다. 헤윰은 미물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무릇 발 디딘 것에게는 자비를 베푼다는 남자가 말했다. 네가 죽인 사람 목숨은 여우 목으로 갚아라. 죄를 다 치르면 ‘라’, 그 꼬장꼬장한 이도 너를 벌하지 않으리라. 너희 꼬리 달린 짐승의 마지막 핏줄만이 남았을 때 내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마.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헤윰의 간을 먹은 나라샤의 치마가 바람 빠지듯 푸스스 가라앉았다. 꼬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헤윰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 웃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조차 그녀의 힘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
‘너는 사람으로 살아라, 아가.’
여우의 마지막 핏줄만을 남긴 어미는 후회 없이 숨을 거두었다.
얼굴을 적신 피를 전부 씻어냈는데도 창은 눈을 뜨지 않았다. 레이번도 그를 재촉하지 않고 셔츠에 밴 핏물을 꾹꾹 짜내기 시작했다. 창이 물었다.
“잘한 일일까?”
“아마도요.”
“범인을 찾았으니까? 아니면 결과적으로 나라샤 호우리를 살렸기 때문에?”
“헤윰 호우리가 원하던 죽음이잖습니까.”
창이 눈을 떴다. 레이번은 담담히 그를 마주보았다.
“나라샤 호우리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짐승으로 죽는 것보다야 나았겠지요.”
창은 입을 다물었다. 용천 가장자리를 벌겋게 물들였던 핏물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