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작성일 : 13-06-1*
글작성자 : YDH
제목 : 13061* 회(랑 와사비) 먹은 날
내용 :
1. 그분께서는 오늘도 또 돈지랄이시었다. 빚쟁이 앞에서 장난하나.
2. 회랑 초밥을 한상 그득하게 차려놓고 혼자서만 젓가락 드는 것도 얄미운데 그걸 또 처 드시지도 않는 꼴이 볼수록 못마땅했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왜 회 아까운 줄은 모르시는지. 좀 팍팍 퍼먹어서 대리만족이라도 시켜주면 덧나나. 마냥 깔짝깔짝대다 달랑 두어 점 집어먹고 일어나는 작태가 눈꼴시기 짝이 없었다. 짜증나. 속으로 욕하는데 갑자기 임도학씨, 해서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아닌 척 했다. 어차피 난 꿀릴 게 없었다.
3. 근데 왜 와사비를 먹일까. 난 꿀릴 거 없었는데. 심지어 오늘은 피곤해서 말대답도 별로 안 했단 말이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오늘처럼 그분한테 찔리는 게 하나도 없는 날도 드문데 왜 하필 오늘 이래요. 다른 때라면 모르겠는데 유난히 결백한 날까지 이러니까 더 성질이 났다. 물론 회가 좀 아깝긴 했다. 맛있어 보여서 그분이 말하는 내내 가끔씩 쳐다본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분 얼굴을 보고 있느니 회를 보고있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좋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겨우 그걸 가지고 나한테 와사비를 그만큼 먹인 거라면 정말, 정말 그분은 나쁜 자식이다.
4. 가끔씩 드는 생각인데 그분을 욕하고 나면 되게 부질없고 허망한 기분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옳은 소리를 괜히 입 아프게 떠든 것 같아서.
5. 어쨌든 그래서 결론은 오늘 오랜만에 울었다는 거다. 인간적으로 너무 맵더라 젠장. 입에 딱 넣는데 잠시만요 형님 이건 좀 아닌데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물론 진짜로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마음같아선 그 자리 박차고 나오고 싶었는데, 그랬다가 내가 회떠질까봐 참고 열심히 웃었다. 웃는 얼굴엔 침도 못 뱉는 법이라니까. 하지만 그분은 역시 비범하시기 짝이 없어서 웃는 얼굴에 와사비 반 밥 반인 초밥을 들이미셨다. 아 진짜 내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름 이쁘게 웃었는데 빌어먹을. 그렇게 생글생글 웃는 입에다가 그걸 처넣고 싶을까?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와사비를 묻혀먹는 게 아니라 덩어리째 생으로 씹어보긴 또 처음이었다. 화생방때 이후로 이렇게 본의 아니게 속수무책으로 운 것 역시 처음이다. 내 처음을 둘씩이나 가져가셨으니 이제 책임도 져주실래요 미친 분아? 하도 매우니까 코가 찡한 걸 넘어서 뒷골이 다 땡기는데 딱 죽을 맛이었다. 눈물을 줄줄 쏟으면서 혹시나 싶어서 눈치를 봤더니 절대 뱉게는 안 해줄 얼굴이더라. 매번 당하면서 희망을 갖는 내가 멍청이지. 속으로 욕하면서 삼켰다. 아무리 내 사정 봐준 적이 없는 인간이라지만 그쯤 괴롭히고도 기어이 삼키게 하는 게 아주 악랄했다.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고 정 아니 그분 나쁜새끼.
6. 그래도 그 다음에 회 얻어먹긴 했다. 맛있었다. 나 혼자 먹어서 더 맛있었다. 내 돈 주고 먹는 게 아니라 더 더 맛있었다. 비록 그분이 집어준 거긴 했지만―혼자 병 주고 약 주면 재밌나? 병 주고 싶으면 그냥 병만 주고 약 줘서 챙길 거면 처음부터 병을 주지 말지, 참 성격 특이하다―, 그분은 그냥 젓가락질 셔틀이라고 생각하자 중간부터는 마음이 편했다. 다음에도 또 먹고 싶다. 평화롭게 먹는다는 전제 하에.]
[글작성일 : 13-06-1*
글작성자 : YDH
제목 : 13061* 오랜만에 신문 봤다.
내용 :
1. 제목 그대로! J사 H사 C사 세가지 다 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 진짜 기분좋다.
2. 그런데 정말 언제부터였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이번달초에 끊은 것 같은데 일기 뒤져봐야지
3. 이상하다. 그런 일을 안 써놓을 리가 없는데 안 보인다. 어쨌든 일단은 여기다 써야겠다 :
신문 끊은지는 한 이주 됐는데 기분상으론 한 달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사실 학교에서 소비의 비가역성 배울 때까지만 해도, 말이 비가역성이지 그냥 사치가 버릇된 거 아닌가 싶었다. 요컨대 절약할 줄 모르는 부르주아의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그런데 막상 내가 쪼들리니까 그게 마음처럼 쉽게 안 되더라. 어떻게든 신문은 사수하려고 했는데, 줄이고 줄이다 도저히 안 돼서 신문 끊겠다고 전화할 때는 정말 착잡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전화받는 안내원이 자꾸 고객님 이사하시는 거면 다른데로 옮겨드릴게요 뭐 불편하신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해가면서 계속 조를 땐 입맛이 썼다. 신문 구독료가 없어서요. 이 한마디 하니까 조용해져서 더 우울했다.
4. 그래서 어쩌다 신문을 보게 된 거냐면 :
오늘 아침에 커피 갖다주다가 나도 모르게 그분이 보는 신문기사를 어깨너머로 읽고 있었더니 언제부턴가 그분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땐 무의식중이라 잘 기억이 안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집요하게 쳐다본 게 아니었나 싶다. 민망하다. 그렇지만 괜찮다. 신문도 줬는데 까짓거 얼굴 좀 팔리는 것쯤이야. 오늘도 보게 해줬으니까 내일도 넘겨주지 않을까? 앞으로도 계속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분이 사람을 갈구긴 해도 인색하진 않으니 딱히 뭐라고 할 것 같진 않다. 내일도 옆에서 얼쩡얼쩡 해봐야겠다.
5. 그리고 일 안하고 대놓고 신문보는데도 뭐라고 안해서 기뻤다. 밥먹을때랑 신문 볼 때는 안 건드리는 거 보면 그분도 나름 괜찮은 상사일지도 모르겠]
"임도학씨."
"예?"
"일 안합니까?"
"하는 중인데요."
도학이 결백한 미소를 지었으나 성인은 수긍하는 기색 없이 도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온달이 때를 놓치지 않고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구라 치고 자빠졌네. 그렇게 동네 잔치난 낯짝을 해놓고 그걸 믿으라고?"
"안 믿으셔도 그게 사실입니다만?"
도학이 상냥한 답과 함께 손가락을 움직여 Alt키와 F4키를 동시에 눌렀다. 바로 다음 순간 온달의 얼굴이 도학의 노트북 너머로 불쑥 넘어왔으나 화면 위에 보이는 것은 어지러운 숫자들의 나열뿐이었다. 온달이 김샌 얼굴을 했다.
"뭐야, 진짜네. 근데 뭐가 그렇게 신나? 존나 변태같이."
"제가 대차변이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건 비밀이니 혼자서만 알아주세요."
반쯤 비아냥대며 어깨를 으쓱이자 곧바로 가차없는 반문이 날아들었다.
"변태십니까?"
"변태 맞네. 너 설마 혼자 할때도 장부 가지고 하냐?"
궁하면 몇 장 뜯어줄 수도 있다며 낄낄거리는 온달을 애써 무시한 도학이 블로그 창을 도로 띄우고는 쓰던 일기를 마저 이었다.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 같다. 모를 예정이다. 그분도 얄밉고 붕어똥은 더 얄밉다. 둘이 쌍으로 신혼여행이나 꺼져버렸으면. 저 둘 없이 혼자서 편안히 쉬면 요새 속 쓰린 것도 싹 나을 것 같다.]
[글작성일 : 13-06-2*
글작성자 : YDH
제목 : 13062* 대낮부터
내용 :
1. 붕어똥이 커피를 타와라 마라 말이 많다. 그분이 커피, 한 마디 하면 그걸 또 쪼르르 따라서 커피 타오라고 시키는 걸 보면 지가 환관인 줄 아는 것 같다. 그럼 난 나인인가? 아니지, 여기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난 나인도 아니라 그냥 무수리인 것 같다. 그나저나 저놈의 미스 임 소리 어떻게 안 되나. 이젠 지긋지긋하다. 붕어똥이 그렇게 부르길래 한 번 질색팔색 했더니 오히려 맛들려서 계속 그따위로 부른다. 짜증난ㄷ]
"미스 임, 뭐해? 커피 안 타오고."
이죽이는 말과 함께 걸어오는 온달이 미처 가까워지기도 전에 도학이 노트북을 탁 덮었다. 저건 저기다 꿀 발라놨나, 왜 사람만 오면 목욕하다 들킨 여편네마냥 놀래서 숨기고 지랄이야. 야동이면 같이 보지? 투덜대는 온달의 목소리를 가볍게 웃어넘긴 도학이 여느 때처럼 탕비실로 향했다. 온달이 간식거리라도 꺼내먹었는지, 항상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설탕통이며 커피믹스 등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도학의 눈가에 엷은 주름이 잡혔다. 흡사 애 키우는 엄마가 빠르게 늙어가는 것과도 비슷한 모양새로 근래에 생겨난 주름이었다.
"이온달씨, 여기서 뭐 하셨습니까?"
진심으로 궁금해 죽겠다는 투였지만 물은 쪽도 들은 쪽도 대답이 이어지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도학은 일단 먹고 남은 화과자 포장지며 탁자에 흘린 주스 따위에 먼저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반 정리. 능숙한 주부마냥 차근차근 탕비실을 정복해나가는 제가 아주 대견하기 짝이 없어서 한숨이 다 났다. 내가 저 붕어똥 뒤치닥꺼리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작은 탕비실에는 있을 건 다 있어서, 설탕이나 소금 같은 기본적인 조미료부터 각종 찻잎이나 커피믹스, 잡다한 과자나 견과류 혹은 사탕 따위의 주전부리가 의외로 한 짐이었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부스럭대자 낌새가 이상했는지 온달의 머리꼭지가 탕비실 입구에 빼꼼히 내밀어졌다.
"미스 임, 요새 팁 안줬다고 독 타냐? 커피 하나 타오는데 무슨 한나절이야."
"그쪽이 어지르신 걸 치우는 중입니다만. 곧 가져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니가 어질러놓고 보채지 마시죠'를 곱게 순화한 도학이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단 거라곤 일절 입에도 안 댈 것 같은 성인은 의외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셨다. 안 어울리게. 티스푼 위로 동그마니 솟은 백색 가루를 탁 뿌리듯 넣고는 휘휘 젓던 도학의 무성의한 손짓에 다갈색 커피 몇 방울이 손등 위로 튀었다. 앗 뜨거, 하며 급하게 손등에 입술을 가져간 도학은 혀 끝에 느껴지는 커피의 맛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확인차 티스푼에 담긴 커피 약간을 입에 털어넣자 간간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국간으로 치자면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에게 마지못한 칭찬 한 마디쯤은 능히 얻어내었을 농도였으나 안타깝게도 커피는 국이 아니었고 성인은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큰형님이었다. 바로 그때, 도학은 기껏 타놓은 커피가 하수구로 직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는 대신 꽤나 유혹적인 대안을 떠올렸다. 그냥 먹일까.
잠시 흔들리던 도학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어떻게 사람 먹는 걸 가지고 장난을―
"임도학씨, 농땡이 10분에 만원입니다."
―쳤었지. 와사비를 아주 듬뿍 먹여주셨지. 그걸 깜박했네. 본래 좋은 일을 하려다가도 괜한 타박을 들으면 마음이 비뚤어지는 법. 그러잖아도 썩 고운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도학은 손바닥 뒤집듯 결정을 번복했다. 먹이자.
[짜증난ㄷ
2. 2시 7분, 소금커피를 드신 그분의 감상은 밍밍하다. 그렇게 밍밍한 맛은 아닐 텐데? 어차피 넣어주는 소금, 한 스푼은 정없으니 한 스푼 더 넣었다. 그것도 티스푼으로 찔끔 넣으면 그분의 스케일에 안 맞으니 밥숟갈로 넣어드렸다. 안 녹을까봐 굉장히 걱정했는데, 뜨거운 커피는 생각보다 포용력이 좋았다. 잘은 모르지만 냉커피였다면 분명히 바닥에 가루가 남았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다 한여름에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신 그분의 홍복이다. 많이많이 드시고 실려가시길.
3. 2시 31분. 진짜로 많이 들이키신다. 그걸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먹다니 대단하긴 대단한데 후환이 두렵다. 한 입 먹을때마다 문득문득 이쪽을 쳐다보는데 그때마다 옆얼굴이 따끔따끔하다.
4. 4시 28분. 황 마담네 술값이 아무래도 이상한 게, 재고를 좀 빼돌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감모가 이 정도로 많을 리가. 얼마 전에 황 마담네 가게에서 이사 둘을 접대한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이딴 걸 여기다 주절주절 쓰는 이유는 그분께 물어보러 갈 수가 없어서다. 젠장. 아까 보니까 거의 다 마신 것 같던데. 그냥 한입 먹고 짜증내면 될 걸 왜 사람 간떨리게 꾸역꾸역 다 처드시는지 모르겠다. 기껏해야 뭐라고 하던지 나한테 먹으라고 시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예상 외라 혼란스럽다.
5. 4시 42분, 결국 물어보러 갔다왔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바닥에 내 사생활이고 인권이고 없는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 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그 말인즉 물어보러 간 걸 엄청 후회중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이나 편하다가 뒷통수를 맞던지 하지, 그분이 다 마신 컵을 봐버렸더니 괜히 찔려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솔직히 비주얼쇼크였다. 까만 머그잔 바닥에 사레들려서 뱉은 비타민씨랑 비슷하게 생긴 게 있었다. 그 허여멀건한 덩어리가 다 소금이라면 난 좀 망한 것 같다. 이제라도 물을 떠다줘야 하는 게 아닌가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그분이 빨리 일하러 안 가시고 뭐하십니까 임도학씨? 하셨다. 그 뒤에 커피라도 한 잔 더 타오려고요? 하길래 지레 놀라서 아니라고 하고 냉큼 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은근슬쩍 물 갖다줄 타이밍이었던 것 같은데. 그놈의 커피 소리만 안 했어도……. 하여간 그분은 도움이 안 되신다.
6. 퇴근시간이 슬슬 다가온다. 지금은 5시 57분. 다행히도 그분은 아까 그 커피에 대해 크게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극도로 짜게 먹는 편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색다른 종류의 커피가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도 신빙성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나한테 뭐라고 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니 좋게좋게 해석할 참이다.
7. 6시 39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오늘은 꽤 좋은 날인 것 같다. 중간과정이야 어찌됐든 일단 처음으로 그분께 한 방(한 잔) 먹인 날이 아닌가. 게다가 앞으로 한 시간쯤 있으면 지난 주 결산도 다 끝날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적당한 긴장이 있으면 능률이 오른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오늘은 무조건 야근일 줄 알았는데 벌써 다 할 줄이야. 빨리빨리 끝내고 퇴근해서 저녁먹고 흐뭇하게 잠들면 딱 좋을 것 같다. 피곤하긴 해도 기분이 좋다.
8. 7시 25분, 오랜만에 인형이랑 시간이 맞아서 더 기쁜 날이다. 간만에 인형이네서 저녁먹고 자고 가야지.]
상쾌한 기분으로 노트북을 덮고 책상을 정리한 도학이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 반영된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온달은 해가 떨어지자마자 냉큼 퇴근해버렸기에 사무실 안에는 도학과 성인뿐이었다. 도학은 커다란 창으로 발간 노을빛이 비쳐든 성인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형님."
"어딜 가십니까 임도학씨?"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 혹은 반문에 문가로 걸어가던 도학이 반사적으로 멈춰섰다. 설마 이제와서. 얼핏 스쳐가는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도학을 불안케 했다.
"퇴근합니다만…"
뭐 문제라도 있냐는, 미처 꺼내지 못한 뒷말을 흐리는 도학에게 성인이 그의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켜보였다. 자리에 앉으세요, 하고 따라나온 말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확한 의사표시였다. 별 수 없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은 도학은 가만히 앉은 채 성인의 지시를 기다렸다.
기다렸다.
또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그렇게 장장 20여분이 지나도록, 성인은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도학이 성인 몰래 심드렁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지나갈 턱이 있나.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마음 속 한켠에서는 이 인간이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의심을 품고 있던 터라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헌데 딱 하나 걸리는 점은 그래서 어떤 대가가 돌아오느냐였다. 애초부터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기에 도학은 성인의 저의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가만히 앉혀만 놓지. 설마하니 혼자 일하기 억울하니 옆에서 함께 잔업을 해달라는 가상한 마음은 아닐 터였다. 만약 일을 시킬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도학에게 서류더미를 한가득 안겨주고도 남았을 성인이었으니까. 그럼 대체 뭘까. 그로부터 약 삼십분간,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침묵을 지키던 도학이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여덟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가뜩이나 안 좋은 위가 심상찮게 꾸룩댄다 싶더니 대침으로 꾹꾹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가방을 뒤져 약봉투를 꺼낸 도학이 소파에 앉은 채로 제산제를 쭉쭉 빨았다. 문득 벽 한켠을 차지한 창문에 멀뚱히 *포스를 빨아먹는 저와 일에 골몰한 성인의 모습이 비쳤다. 그 기묘한 부조화가 우스워서 도학은 소리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성인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창문에 비친 도학을 빤히 마주보기 전까지는. 도학의 눈가에 어린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입 언저리의 거짓 웃음만이 고스란히 남았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도학은 창문에 비치는 성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슨 수작이세요?'를 보다 정중하게 에둘렀다. 그에 돌아온 것은 딱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난 여기서 뭐 하라고? 조금 심심했던 터라, 도학은 성인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사실 한 시간이나 쥐죽은 듯이 앉아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기다림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도학에게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긴 했으나 그 역시 사람인데 지겹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럼 이제 뭘 하지. 무료하게 바닥으로 향하는 도학의 눈동자와는 반대로, 성인의 두 눈에 즐거운 기색이 슬쩍 내비쳤다. 안타깝게도 도학은 그것을 미처 포착하지 못했다.
+
"임도학씨, 심심합니까?"
불쑥 건네어진 말에 까무룩 잠에 빠져들던 도학이 눈을 반짝 떴다. 언제부터 졸았는지는 몰랐으나 마지막에 확인한 시간이 새벽 세시가 조금 넘었던 것은 확실했다. 멍한 정신을 추스르기에 앞서 도학이 피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서비스업 종사자의 애환을 보여주는 양 애처로운 미소였다.
"아닙니다."
여섯 번째로 하는 똑같은 거짓말에 성인이 변화구를 던져왔다.
"임도학씨, 노래 잘 아시는 거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도학이 졸고, 심심하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면 성인은 그럼 계속 천장 무늬나 세라는 식의 의미없는 지시를 건네고 도로 서류에 눈을 돌리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다섯 번이나 같은 걸 반복했으면 암묵적인 절차라고 보아도 좋았다. 적어도 도학의 상식선에서는. 그런데 왜 이제와서, 새벽 세시 사십칠분에 이런 시련이 찾아온 걸까. 도학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아뇨. 없습니다."
성인이 뭔가 물어볼 때는 일단 빼고 보는 것이 도학의 습관 아닌 습관이었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때 꽤 현명한 대처방법이기도 했다. 본래 하기 싫은 일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제 몸 사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럼 곰 세마리 동요는 아십니까?'
단지, 성인이 구태여 남이 못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시키는 쪽을 선호한다는 점을 차치한다면 말이다. 도학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잠이 싹 깨는 기분이었다. 기분 탓인지 정말인지 몰라도 뱃속이 다시금 콕콕 쑤셔왔다.
"……."
"부르십시오."
임도학, 미쳤네 진짜. 다른 이도 아니고 성인의 앞에서 졸다니 제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싶었다. 엉덩이로 이름을 쓴 굴욕이 겨우 몇 주나 지났다고 그새 이만치 방심해버린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도학이 졸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임전태세였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서 듣기에 거북하실 겁니다."
"별로 기대도 안 하고 있으니 부르십시오."
"가사도 가물가물합니다만."
"폰은 뒀다 뭐 하십니까?"
"핸드폰으로 틀어 드릴까요?"
"반주 있어야 노래 부릅니까?"
그 뒤로도 한참 이어진 실랑이 끝에, 성인이 기어이 마법의 언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임도학, 시작해. 도학의 접대용 미소에 파삭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곰…세마리…가…한…집에…있…어……"
도학이 우중충하게 첫머리를 시작하자, 조만간에 곰 일가족이 토막살웅 사건에 연루될 것만 같은 음침한 분위기가 사무실 안에 감돌았다. 원체 타고난 목소리가 달착지근하고 부드러운 편이라 아주 못 들어줄 것은 아니었으나 음의 높낮이 변화가 미묘하게 반음씩 모자랐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도학을 더욱 괴롭게 했다. 학창시절, 도학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육상을 제외한 모든 체육 실기와 가창시험. 음감이 나쁜 것도 아니고 실제로 기악 실기는 만점을 놓쳐본 적이 없는 도학이었지만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악기만큼은 어떻게 다룰 줄을 몰라 쩔쩔매곤 했다. 그런데 하필 이걸 고르다니. 지금 순간 성인은 죽어도 싫다는 도학을 기어이 반 아이들 앞에서 노래하게 만드는 음악선생님처럼 보였다.
"애기…곰은…너무 귀여워…으쓱…으쓱…잘…한다……."
일가족을 위한 장송곡을 마친 도학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 하며 슬그머니 손등을 대어 달궈진 뺨을 식혔다. 잠은 고사하고 커피 한 사발을 들이킨 것마냥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 피를 뽑아보면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돌고 있겠지.
"임도학씨, 심심합니까?"
"전혀요."
이를 악물고 눈만 슬쩍 휘어 웃자 성인이 웬일인지 마주 웃어주었다. 그것도 정말로 다행이라는 투로, 몹시도 친절하게.
"그거 잘 됐군요. 율동도 같이 해 보십시오."
"……."
음악선생님이 아니라 초등학교 담임이었구나. 도학의 심장이 철렁했다.
[글작성일 : 13-06-2*
글작성자 : YDH
제목 : 13062* 퇴근=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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