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 갈란다. 너는 어서 가거라."
참혹했던 겨울, 할아버지는 매일 그 말씀을 반복하셨다. 너는 어서 가거라. 당신의 목숨이 다하는 일이 있더라도 고향 집을 지키겠다던 할아버지의 의지를 나는 감히 꺾을 수 없었다. 서서히 엄습해오는 추위가 끝내는 당신의 숨결마저 얼려버릴 거란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걱정이나 예감을 넘어선 본능적인 확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죽음의 그림자는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지독한 추위가 가져온 흰 빛은 일견 순수해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마침내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붙었을 때, 할아버지 혼자만이 붉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너는 어서 가거라."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두꺼운 커튼을 겹으로 친 침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고, 나는 임박한 그분의 임종에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늦기 전에 어서 가라는 말씀에 그저 엷은 웃음으로만 답해도 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생각이긴 했지만, 내가 이미 당신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
바람 소리를 타고 흐릿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슬그머니 침실의 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침실에 달기 위해 커튼을 떼어낸 거실 창문은 지옥으로 통해 있었다. 비명소리가 난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다를까, 사람의 탈을 쓴 야수들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만찬을 즐기는 그들의 흐린 초점과 광포한 움직임, 맹목적인 식욕을 보며 나는 이 공포가 할아버지께는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했다.
매번 두려움과 역겨움에 몸서리치면서도 나는 잔인한 식사를 훔쳐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외로이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비겁한 나의 속죄였으며, 또한 나의 바람이었다. 언젠가 내가 이 지옥에 몸을 던질 때 누군가 나의 죽음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 나는 내 스스로 저들의 이빨 앞에 목을 내놓을지언정 괴물로 살고 싶진 않았다. 내 가족의 소중한 집이 있는 이 곳에서 나는 괴물이 되어선 안 됐다.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만 보이는 광기와 할아버지의 시트가 경쟁이라도 하듯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가던 그 겨울, 내 소원은 딱 하나뿐이었다.
'신이시여, 부디 사람으로 죽게 해 주십시오.'
무신론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떤 종교도 접해본 적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매일 밤, 아니 매 순간마다 신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미 이 모든 악몽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기엔 나는 너무나 지친 상태였으니까.
무엇이 사람들을 피에 굶주리게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내게 극도의 불안감을 선사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단순히 출입구를 봉쇄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긴, 거동이 불편해 수 년째 집에서만 산다던 노파가 앙상한 두 팔로 눈밭을 기어 다니는 꼴을 보고도 안심할 수 있다면 그건 내 머리가 점점 이상해져 간다는 증거였겠지만.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순간, 내가 매일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외부와 접촉해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튼튼한 샤시로 된 유리창 두 겹, 얇은 커튼 하나에 두꺼운 채광커튼 둘을 방패막이로 삼은 할아버지에 비해 나는 너무도 '위험했다'. 일견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차이가 내 안에서 어떤 짐승을 끌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겉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고,
내가 사람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괴로웠으며,
그 사람이 할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 절망 속에서도 나는 꽤나 빠른 시간 안에 이성을 찾았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기민하게 최대한 나와 할아버지의 접촉을 막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때 발휘한 이성은 어쩌면 내 안의 인간성의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짐승이 아니게 하는 가장 큰 무기, 이성을 과시하며 그 존재가 위협당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을 사수하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때의 나는 담담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감기가 걸린 것 같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날부터 다락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그 방은 할아버지의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또한 가장 추운 방이기도 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추운 방에서 언 발을 하루종일 주무르면서도 나는 할아버지께 식사를 가져다 드릴 때를 제외하곤 절대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할아버지와의 접촉을 피한 상태로도 나는 아래층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분이 외롭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지 몇 일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내 손에서 빵을 받아먹는 할아버지의 입김이 유난히 차게 식은 듯 느껴졌다. 산 사람의 온기를 이미 잃은 그 날숨에 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내 손에.
그것은 처절한 사투도, 비장한 희생도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끓어오르는 식욕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한 마리 짐승의 사냥이었고 살기 위한 생명의 몸부림이었다.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추위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손발을 주무르던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려와야 했지만, 집 안 전체에는 기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순간 그 침묵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나도 모를 이유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침묵이 결코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오는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긴장감. 그래, 긴장감이었다. 공포마저 넘어서는, 거대한 위협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때 온 몸에 치솟는 긴장감. 나는 어떠한 두려움도 슬픔도 느끼지 못한 채 본능적인 긴장감만을 전신에 두르고 다락방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밤새 얼어붙어 잘 열리지 않는 문이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할아버지의 침실 문을 부수다시피 뛰쳐나온 '그것'이 계단 위에서 문을 연 채 서 있는 날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들어올렸다. 나로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속도로 계단을 튀어 올라온 '그것'이 내 발길질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퍽.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내가 살아난 것은 요행이었다. 코어가 되지 않고 제네시스가 된 것만도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날 내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 코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운이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난 당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중에서 걷어차인 탓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계단을 굴러 내려갔고, 우연찮게도 '그것'이 계단이 꺾이는 부분에 세워 둔 장식장에 머리를 들이박았고, 마침 그 장식장 안에는 단단하고 뾰족한 교회 첩탑 모형이 들어 있었으니까. 사진을 찍고 돌아올 때면 이것저것 사들고 오는 부모님의 습관이 날 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이시여, 부디 사람으로 죽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위해서 했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끝내 그 분이셨을까. 아니면 죽기 전에 이미 '그것'에게 자신을 빼앗기셨을까. 그 날 이후로 이 의문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고 있다. 이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지 잘 알면서도, 내가 그 분의 마지막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없이 괴롭다.
"ACG에 지원하겠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슬픔을 느낄 이가 없기를.
더 이상은 이 긴 겨울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나길 원치 않는다. 비겁하게 유리창 뒤에 숨어서 '할아버지를 지킨다'는 알량한 자기변호나 하던 나는 결국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할아버지께는 이 겨울이 그분의 마지막 겨울이 되었지만, 내겐 죄책감과 외로움을 덧칠한 겨울이 되었다.
아프다. 아프다. 그저 두렵고 고통스럽기만 하던 겨울이 이젠 더 내 안을 갉아먹는 것이 느껴졌다. 가족을 위한다는 든든한 방패는 사라졌고, 나는 살아남은 죄로 매일매일을 악몽 속에 살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내게 보이는 것은 붉게 물든 겨울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ACG에 자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견딜 것인가, 맞설 것인가. ACG는 겨울 속에서 고통받던 내게 선택지를 내밀었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겨울을 끝내겠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겨울을 하염없이 인내하기엔 나는 이미 충분히 외롭다. 유리창 앞에 선 나는 고독한 관객이었으며, 나를 지탱하던 가족도 이젠 사라졌다. 더 이상은 이 겨울을 참아낼 자신이 없다. 그러니 끝내겠다. 반드시 끝나야 한다. 설사 이 겨울이 나의 마지막이 되더라도, 이 겨울을 마지막 겨울로 만들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겨울은 끝나야 한다.
'Their stories > 잊기엔 아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을 마주하는 하루 (0) | 2013.06.28 |
---|---|
두통 (0) | 2013.06.28 |
망자를 그리는 밤 (0) | 2013.06.28 |
불청객의 의료봉사 (0) | 2013.06.28 |
목을 잃은 명마 (0) | 2013.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