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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oulful flowerbed

2013. 6. 28. 16:01 | Posted by 로안담

꽃만큼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또 있을까. 화사한 자태와 더불어 그 안에 움튼 생명까지도 뽐내는 꽃은 몇 번을 보아도 생소하기만 하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만개한 꽃들을 보고도 낯선 향기에 매혹될 줄 모르는 마음은 되려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절감할 뿐이다. 어찌보면 조금 유난스러운 감정이긴 하다. 아무리 메마른 사막이라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선인장 틈바구니로 고개를 내밀던 선명한 색채의 꽃송이나, 오아시스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보이던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들꽃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꽃'을 대표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 보이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도 꽃이 무엇인지 정도는 꽤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심심찮게 보았던 선인장 꽃마저도 쉬이 그려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붉디붉은 빛깔부터 도톰한 꽃잎까지, 전부 손에 잡힐 듯 떠오르다가도 아릿하게 흩어지는 꽃의 잔상. 그것을 한참 쫓다가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아, 내게 꽃은 허락되지 않았었지.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오직 일족의 승리와 조국의 영광뿐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다른 생명까지 찬미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였나보다. 꽃을 어여삐 여길 줄 모르는 내가 꽃의 달콤한 향에 취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는 좀 친해져 보는 것도 좋을텐데 말이야. 그렇지? 꽃과 자신, 둘 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나조차 알 수 없는 반문을 던져본다.


“네가 이 의뢰를 맡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때마침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한 말을 해온 것은 어엿한 한 사람의 네크로맨서라, 슬며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억울한 척을 해 본다. 글쎄, 나보다는 사실 네 쪽이 더 상상이 안 갈 법하지 않아? 방금의 복수라면 복수인 셈으로 있는 힘껏 정곡을 찔러 보았으나 그에 돌아온 대답은 맥빠지게도 겨우 한 글자다.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너 자신을 알라, 헨젤.”


미간을 콕 찔러가며 그렇게 타박하긴 했지만 사실 나의 친구는 일반적인 네크로맨서의 외양과는 영 거리가 먼 녀석이다. 물론 저 졸린 듯한 얼굴 뒤에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는 가칭 '발 없는 친구들'을 본다면 어느 누구도 헨젤 그리피스가 네크로멘서답지 못하다는 말은 할 수 없을 테지만. 잠시 너와 그들의 적응되지 않는 상하관계를 떠올리며 피식거리고 있자니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녹색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너는 어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까. 네 것이 아닌 두 개의 눈동자를 앗아간 모래바람이 너를 그만큼 깎아냈을까? 죽음조차 겁내지 않을 정도로? 실은 조금 궁금했다. 편견이긴 하지만, 사실에 기반한 두려움을 사는 직업을 네가 굳이 택했던 이유가. 알고 싶지 않다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끌어낼 이야기는 아닌데다가, 먼발치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꽃들을 외면하고 굳이 꺼내고 싶은 화제도 아니었기에 나는 뻔한 엄살을 부리는 쪽을 택했다. 실감나는 연기가 아니었던 탓인지 그다지 잘 먹혀든 것 같진 않았다. 네가 내 손가락을 더욱 단단히 옥죄고 못살게 구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보면. 장난스럽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가 싱그럽다.


“아프잖아, 헨젤!”


손가락을 겨우 빼내는 척을 하며 괜한 심통을 부려본다. 어째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조금 민망하지만 모른 척 싱글싱글 웃었다. 문득, 허리께에 겨우 올라오는 애늙은이 하나가 생각나 더 멋쩍은 기분이 된다. 다 큰 어른 주제에 여섯 살배기보다 더한 응석이라니 좀 심하긴 하지. 그렇지만 마냥 편안한 지금의 분위기가 좋아서 더 멋대로 굴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약간 복잡한 머릿속 상념들을 털어버린 채,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십대 사내애들마냥 사소한 장난질로 킬킬거리는 지금이, 마냥 좋았다.





더 많은 꽃들을 찾아 들어선 한낮의 평원은 많은 소리가 이루어낸 정적을 담고 있었다. 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이들이 입을 다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온갖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바람이 만들어낸 부산스러운 풀잎의 노래, 사람의 기척에 서둘러 몸을 숨기는 풀벌레나 작은 짐승들의 움직임, 부드러운 풀밭에 착실히 제 흔적을 남기는 너의 발소리. 형편없이 짓눌렸을 풀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마지막 소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모든 소리는 내가 걸음을 옮길수록 멀어져갔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은 타박타박, 일정한 울림을 지닌 채 내 곁에 머물렀으니까.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옆에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애써 말을 붙이지 않아도 지루해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한참을 말없이 걸어들어왔으니 심심할 법도 한데, 그새 익숙해져버린 안온한 기분에 외려 입꼬리만 슬며시 올라간다. 바로 그때, 보폭이 달라서인지 계속 따로 놀던 둘의 발소리가 우연히 맞아들었다. 마치 마법처럼, 우리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준 선물처럼. 우스우리만치 사소한 것인데도 왜 그리 좋았는지. 하마터면 휘파람이라도 불 뻔 했다. 오로지 걷는 것만으로 충만한 이 기분을 깨기 싫지만 않았다면 아마 분명히 그랬겠지. 바보같은 즐거움을 혼자서 품고 히죽 웃으려니 뺨에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어느새 어긋나기 시작한 발소리 너머로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에 스프를 가르쳐달라고 했지.”

“응.”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지.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제풀에 잊어버린 이야기였다. 어쨌든 아직은 집도 구하지 못했으니 당장 급한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저 앞으로 여관이 아니라 집에서 살게 되면 바나타에게 먹일 게 없을테니 배워놔야겠단 심산으로 지나가듯 말했던 건데 신경쓰고 있었다니 조금 미안해진다. 물론 그보다 배로 고맙기도 하고.


“뭐 생각해본 거 있어?”

“무난하게 크림 스프. 달콤한 게 끌린다면 단호박 스프.”


단호박이라면 달짝지근하니 애들 입맛엔 그럭저럭 합격점이겠지. 물론 내 요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전제 하에. 더 고려할 것도 없이 단호박 스프를 외치려 할 때, 맹랑한 우리 꼬맹이의 얼굴이 눈 앞을 스쳐간다. 녀석에게 애답지 않은 구석이 한둘도 아닌데 거기에 입맛이 포함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나중에 애기한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게 나으려나. 일단은 둘 다 마음에 든다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며 대답을 망설이자 그럼 둘 다 하자는 명쾌한 해답이 돌아왔다. 실로 명답이다. 바나타가 둘 다 싫다고 하면 그땐 내가 다 먹으면 되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편식부터 고쳐준 다음 다 먹이면 되겠구나. 아이의 식탁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터라 새삼 내가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와닿는다. 솔직히, 조금 심란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외로 가사에 출중한 나의 친우는 스프에 꽃을 넣자는 듣도보도 못한 제안을 해 왔다. 네 요리실력을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짓무른 풀 씹는 맛일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맛은 모르겠지만 보기엔 좋겠다는 말로 슬그머니 한 발을 뺐다. 헨젤, 난 꽃이 맛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어. 내 미적지근한 반응이 너를 자극했던 걸까? 네가 꽃을 스프에 첨가해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향도 좋고, 꿀이 있어서 달콤하기도 하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 나는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하하, 우리 헨젤 말하는 게 무슨 요리 연구가 비슷해 보이는데?”


나는 끝까지 좋다고는 안 했다, 헨젤.


“엘리스가 말해준 거야. 꽃 스프는 어떠냐고.”


드디어 꽃과 스프를 함께 먹는다는 참신한 발상의 근원지가 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라 말해줘도 모르긴 하다만. 내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가게 주인이라는 부연설명이 따라붙는다. 엘리스, 엘리스라. 내게 말해준 적이 있던가? 네가 말하는 엘리스가 마치 닮지 않은 누이처럼 보이는 흑발녹안의 여인이라면 내가 봤던 사람이 맞을 게다. 너희 가게 반대편 문에서 나오는 것을 봤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난 왜 궁금해하질 않았을까. 하도 찰나간의 마주침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막연히 네 연인이거나 가족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것일 텐데. 이런 작은 일에서도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언제쯤이면 나는 당연스럽게 네게 이것저것을 캐물을 수 있을까. 대체 언제쯤에야 서로를 내보이는 것을 꺼리지 않을 수 있지? 조급함을 숨기려 그저 고개만 끄덕여본다. 다행히도 너는 그 묵묵한 긍정을 되돌려주었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났어?”

“오래 전 어느 사막의 마을에서 처음. 그리고 우연하게 만나고, 또 만나고.”


인연이구나.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지금은 함께 살고 있다는 너와 그녀의 연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난 너희의 사연을 모르니까, 아주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때마침 그 사연의 끝자락이 슬쩍 풀려나온다. 엘리스가 없었다면 난 사막에서 말라 죽었을지도 몰라.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상 치고는 제법 담담한 말투다.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섬뜩할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네가 안쓰러웠다. 주제넘게도.

 

“너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


그 여상스러운 말이 꼭 '너도 누군가에게 구명받아야 할 정도로 절박했던 시간이 있었겠지' 라는 말처럼 들렸다면 내 피해의식이 과한 탓일까. 너는 이미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네게서 슬픔의 그림자를 찾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서글펐다. 마치 내가 널 동병상련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서. 그건 절대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우리의 동질감이 거친 사막의 바람에 기인하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나는 그걸 네가 알았으면 했다.





바삐 발을 놀려 앞서가던 너는 어느새 사그라든 웃음을 내게 다시 되찾아주었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못한 고소苦笑이긴 했지만.


“……그런데 헨젤.”

“응?”

“꼭 저놈들, 아니 저분들을 불러둬야 되나? 우리 둘만으로도 충분하다구.”


헨젤, 나는 우리가 같은 의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저기서 꽃 퇴치 의뢰를 충실히 수행하는 '친구들'을 보기 전까지는. 아예 꽃이라는 존재를 이 널따란 평원에서 멸절시키겠다는 투지마저 엿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꼭 사신처럼 보인다. 그것도 꽃 전문 사신. 비록 낫은 들지 않았지만 꽃의 모가지를 댕강댕강 끊어내는 솜씨가 당장 그쪽 업계(?)로 취업해도 될 만큼 일품이다. 대체, 곤란에 처한 소녀를 대신해 꽃을 따다 준다는 상큼하고 로맨틱한 의뢰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내 기운빠진 어조를 눈치채지 못했을 네가 아닌데도 너는 얄궂게 웃기만 했다. 아니, 눈치챘기 때문인가?

 

“귀엽잖아.”


역시 알고 이러는구나. 나는 결국 네가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결론은 '너 이상한 소리 한다'는 내용으로. 그리고 반쯤 예상하긴 했던 대로, 나는 너와의 논쟁에서 자주 그랬듯이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이 기회에 저 애들과 인사라도 나눠볼래? 너 전에 인사해둬야겠다면서, 딱 좋은 기회네.”

“사양할게. 저 둘의 데이트를 방해했다간 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거든.”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가며 꼬리를 말자 네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어린다. 어련하시겠어,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 볼을 꼬집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물론, 나는 잠깐의 감정에 휩쓸려 네 말이라면 껌벅 죽는 '애들'의 존재를 잊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그저 대체 그 웃음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소극적인 대처를 했을 뿐이다. 너무 약한 반격이었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네게서 뾰족한 답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사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어.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다지 안 기뻐하고 너는 흥미진진했을 생각이었겠지. 이거 어디 저런 '애들'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내심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내 얼굴에는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나는 너와의 이런 사소한 농담따먹기가 몹시도 즐겁다. 과거의 나는 왜 이런 젊음을 미처 누리지 못했는지 한탄스러울 정도야.


“라이달, 넌 꽃 좋아해?”


즐거웠던 꽃 채집을 마치고, 실수로 뭉그러뜨린 꽃송이들을 네 눈치를 봐가며 슬쩍슬쩍 버리고 있을 때였다. 나로서는 따라하기 힘든 섬세한 손놀림으로 꽃들을 자루에 담던 네가 문득 던져온 질문은 다시 오늘의 처음으로 회귀해 있었다. 저 먼발치에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마냥 멀게만 느끼고 있었을 그 때로. 과거의 내가 대답했다. 꽃은, 불편해. 겨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나왔을 그 대답은 목에서 탁 막혔다. 왜? 내겐 항상 당연한 감정이었던 그 답이 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꽃을 내려다보았다. 의식하지 않을 때 미처 몰랐던 꽃향기가 훅 끼쳐왔다. 달콤했다. 손톱 끝에 풀물과 꽃물이 얼룩덜룩 배었다. 싫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질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멀게만 느꼈던 꽃이 겨우 하루아침에 달라보인다는 것이 얼떨떨하긴 하지만, 그 감정조차 싫지가 않다. 내가 내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분명 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직은 그렇게 좋은 걸 모르겠어. 하지만 싫지도 않아. 이건, 내가 네게 기대했던 많은 처음 중 하나인 걸까. 결국 나는 꽃을 좋아하냐는 네 물음에 지극히도 평범한 답을 들려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음,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네. 보기는 많이 봤지만 내가 꽃으로 뭘 하는 것도 아니고. 넌?”

“나도. 근데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예쁘다고는 생각했었어.”

“처음 볼 땐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언제가 처음이었는데?”


사실 '누구나'라고 하면서도 약간 찔리긴 했다. 내 처음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저게 꽃이구나, 먹을 수는 없고 향은 있다는데 잘 모르겠고 쓸모는 별로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미련 없이 지나쳐버렸던 기억이 전부다. 어지간히 삭막한 꼬맹이긴 했지. 언젠가 했던 것도 같은 생각을 하며 꽃을 본 것은 언제가 처음이었냐 물었더니 너는 '누구 집에서 선인장 꽃을 봤었을 때'라고 했다. 집에서 봤다는 걸 보면 사막을 벗어난 후가 아닐까 싶은데, 하필이면 선인장 꽃이 너의 처음이었다니 너도 참 어쩔 수 없는 사막의 자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선인장 꽃을 그리는 것일까. 네 시선이 또다시 아련해진다.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먼 곳을 보는 너를 보고 있자니 네가 그리워하는 것이 다만 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하찮고 가벼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소중하고 절박한 것일수록 그리워하는만큼 너를 무겁게 짓누를 테니까. 나는 그렇게 바라며 기도하듯 차곡차곡 꽃을 담았다.


“힘들어?”


준비한 자루에 담을 수 있는 만큼 꽃을 챙기고도 너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생각이 그리도 깊은 건지. 궁금한 마음에 슬며시 네 시선을 따라가보지만 그 끝에 닿는 것이라고는 평원을 초토화시키는 두 악령들뿐이다. 저 꼴을 보고도 멈출 생각을 않는 걸 보면 그들을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엇을 보는지는 몰라도 너는 꽤나 평화로워 보였다.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 미안할 정도로.


"일으켜줘야 돼?”


그냥은 좀 낯간지러워서 밉살스런 말을 내뱉은 뒤에야 손을 내밀었다. 실은 아주 좋아서 내민 손은 아니었다. 지금의 네가, 그리고 내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떠나지 않고 싶은 미련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으니까. 내 손을 선선히 잡아오는가 싶었던 네가 나를 그대로 끌어내린 것은, 역시 너도 지금이 아쉬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네 힘에 버티거나 하지 않고 냉큼 균형을 잡고 앉았던 것도 기꺼운 내 마음이 일부 반영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오늘을 쉽게 끝내기가 싫었다.


“조금 더 앉아있다 가자.”


그래서, 나는 그 말이 참 반가웠다.



+

“왕자님이 따로 없네.”


내가 이 말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알면 너는 웃을 테지. 언제가 좋을까, 내일? 모레? 아니면 다음 주쯤? 바나타와 함께 너를 찾아갈 날짜를 가늠해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로 왕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준 왕자쯤 된다고 하면 네가 어떤 얼굴을 할지. 그 땐, 정말로 네가 덜 숙성된 예언자 정도는 되는 것 같다며 등이라도 두드려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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